'지지않는 나라 만들겠다'더니 결과는 '가장 만만한 나라' [여기는 논설실]

문재인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일본 공영방송 NHK는 어제 "문대통령이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바라고 있지만 그임기 내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제 강점기 징용 문제나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이 수용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할 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도의 맥락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더 이상 '한국의 카드'가 아니다. 어느 틈엔가 우리가 대폭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부담스런 외교 사안이 되고 말았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야말로 기막힌 반전이다. 2018년 정부는 '다시는 지지않겠습니다'라는 자극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반일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만에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매달리고 있고, 일본은 노골적으로 한국을 무시하고 있다. 큰소리 친 것과는 정반대의 당혹스런 전개다.

스가 총리는 작년 9월 총리 취임후 첫 기자간담회에서부터 한국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문대통령이 관계 개선의지를 수차례 내비쳤음에도 스가의 '한국 패싱'은 이어지고 있다. 얼마전 미국 중재로 모테기 일본 외무상과 회담을 가진 정의용 외무장관은 그전까지 취임 3개월이 지나도록 전화 통화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일본의 거절 때문이었다. 한국 대통령도 장관을 상대로한 일본의 무례는 일상이 됐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로 발생한 방사능 오염수를 해양에 방류하는 과정에서 최인접국인 한국 정부를 사실상 '패싱'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고위관계자는 주변국에 대한 설득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해 "한국 따위에게 (오염수 방류 관련 견해를) 듣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미국도 한국을 만만한 나라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10일 뒤면 한미 정상회담이 있건만 바이든 행정부는 얼마전 새 대북 전략을 공개했다. 정상회담에서 조율을 거쳐 발표하는 것이 좋은 모양새일텐데도 신경쓰지 않았다. 기회날 때마다 '한미 동맹은 굳건하다'고 립서비스중이지만 미국은 한국의 백신공급 요청을 외면중이다. 남는 백신을 주변국에 지원하고 관광객에게까지 놔주면서도 동맹 요청은 모르쇠다. 한국과 핵심적인 가치와 안보전략을 공유하기 힘들다는 내부의 지적도 이제 공공연하다. 그렇다면 공을 들인 중국은 우리를 존중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3불'까지 천명했건만 아직도 사드보복을 이어가는 데서 명확하다.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주권 포기'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편을 들었지만 중국은 한국을 장기판 졸처럼 대한다. 국가위상 추락 피해는 기업들에게도 돌아가고 있다. 중국 베이징에 설치된 삼성과 현대자동차 광고판 120여 개가 예고 없이 심야에 철거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진핑의 무례한 행동도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그는 문대통령 면전에서 조율되지 않은 '사드 철회' 얘기를 불쑥 꺼내는가 하면 정중한 방한 요청도 3년 넘게 '알겠다'는 말로 뭉개고 있다.

러시아도 별반 차이가 없다.2018년 모스크바 한러 정상회담 당시 50분이나 늦게 나타났던 푸틴은 이후 수차례 방한 요청에 묵묵부담이다. 지난해 한러 수교 30주년을 흘려보냈고, 대통령 특사까지 보내 방한을 요청도 외면하고 있다.

EU 등 주요국도 한국을 진지한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확연하다. 문대통령의 외교 멘토라는 문정인 교수조차 '코리아 패싱'이라는 단어를 공공연히 입에 올릴 정도다. 자연히니 문재인 정부 4년간 방한한 외국 수반은 손에 꼽을 정도다.미국(트럼프)을 제외하면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이 있는 나라로는 인도(모디) 정도가 유일하다. 이 모든 것은 북한 역성들기를 최우선으로 하다가 자초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을 들였다는 북한은 한국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다. 일개 국장이 나서서 문 대통령을 거칠게 비난하는 지경이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와 글로벌 규범을 등한시하다보니 '믿지 못할 한국'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는 모습이다. 가치와 대의를 따르기보다 ‘눈치’로 일관하고 있는 행태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약화시키는 악순환이다. 한번도 경험못해본 ‘만만한 나라’의 푸대접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나.

백광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