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테크 따라잡기] 생체모방기술의 진화, 더 나은 인공 효소를 그리다

글 정영도 KIST 생체재료연구센터 선임연구원
올해 3월, 인텔은 배상금만으로 2조4500억 원을 VLSI 테크놀로지에 지출해야 했다. 2건의 특허 침해에 대한 배상금이다. 현대사회에서 원천기술의 경제적 의미가 얼마나 큰지 어림잡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모방해도 공짜인 대상이 있다. 바로 ‘자연’이다.

일명 ‘찍찍이’로 불리기도 하는 벨크로는 도꼬마리라는 식물의 열매 구조와 형태에서 힌트를 얻어 혁신적인 발명품이 되었다. 벌써 60년 전의 일로, 생체모방기술 산업화의 첫 사례다.이 이후에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많은 문제의 해결책 또는 혁신적 발명의 근거를 ‘자연’에서 찾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단순히 기능만을 모방했으나 최근에는 생명 자체가 가진 기술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는 인공지능, 인간의 근육을 대체할 수 있는 인공근육, 생명 진화 초기 상태의 환경에서 생성된 세포를 구현하기 위한 인공세포 등이 그것이다. 이제 인류는 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자연에서 찾고 있다.

화학산업에서의 천연 효소 활용
세포의 복잡한 생명현상은 수십만 가지의 화학반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생명현상에서 이런 화학 반응들은 어떻게 조절될까. 바로 효소가 화학반응의 주체다. 세포는 생명 활동을 이루는 화학반응을 통해 필요한 에너지와 물질들을 얻는다. 효소는 촉매로서 세포 내부의 화학반응에 필요한 에너지를 낮춰 물질대사의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이런 효소의 친환경적 촉매 기능과 생물학적 기능은 기존 촉매를 대체하거나 생명 현상을 조절하고자 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기에 매력적이다. 그러나 천연 효소의 복잡한 구조는 활용하고 싶은 환경에서 쉽게 변형되거나 그 기능을 잃기 때문에 기능 및 구조의 편집이 필요하다. 마치 도꼬마리 열매에서 둥근 열매의 형태는 빼고 그 표면구조만을 추출하여 혁신적인 접착 방식을 만들었듯 효소를 원하는 분야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기능만을 추출하고, 부족한 기능은 채워 넣은 인공효소가 필요하다.

초기에 천연 효소의 활용이 시도된 분야는 화학산업이다. 천연 효소는 기존 촉매와 달리, 비교적 저온에서 반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천연 효소 반응은 화학 반응에 유기용매가 아닌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유기용매는 생산 및 폐기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비용과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물을 용매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화학산업을 친환경산업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학산업에서 아직 천연 효소가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지 않은 이유는 천연 효소를 활용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게다가 천연 효소는 온도, 산성 정도의 변화에 내구성이 약해서 여러 번 재활용하기 어렵다. 만일 천연 효소의 수용성과 촉매 기능을 모방하고 내구성을 갖춘 인공효소가 개발돼 화학산업에 적용된다면 환경오염의 이미지가 강했던 화학산업이 친환경산업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비용도 절약하면서 말이다.
일명 ‘찍찍이’로 불리는 벨크로의 표면을 확대한 모습. 벨크로는 식물 열매의 표면 형태에서 힌트를 얻어 발명된 제품이다. / shutterstock
갈고리 모양의 가시가 나 있는 열매 도꼬마리 / shutterstock
생명과학, 의학 등 적용범위 넓히기 위한 인공효소의 필요성
생명과학 분야에서도 천연 효소는 널리 쓰인다. 바이오와 관련된 연구실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단백질 정량 방법은 효소면역측정법(ELISA)이다. 항체나 항원에 효소를 부착하여 효소의 활성 측정을 통해 항원과 항체의 양을 간접적으로 측정하는 방식이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는 효소의 활성이 변하지 않도록 냉장, 냉동 보관 및 유통이 필수적이다.따라서 효소면역측정법을 위한 키트는 실제 원료인 항원과 항체 개발 및 생산 비용보다 훨씬 비싸진다. 그러므로 상온에서 생화학적 촉매 기능을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는 인공효소의 활용은 보관 및 유통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효소면역측정법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키트의 가격을 낮출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공효소에서 가장 복잡한 기능이 필요한 영역은 의학 분야다. 세포의 거의 모든 대사 과정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빠른 속도로 일어나야 한다. 이 때문에 세포 내 화학반응 속도를 조절하는 효소가 꼭 필요하다.

또한 효소는 세포의 환경 변화에 따라 촉매 기능을 멈추기도 한다. 즉 환경에 따라 촉매 기능을 켜고 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런 효소의 화학 반응 조절은 세포가 세포 내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항상성의 근간이 된다. 따라서 우리 몸에 효소가 부족하거나 효소의 조절 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다양한 질병이 나타난다.

부족한 효소를 세포에 전달하는 것이 가장 단순한 질병 치료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질병에 걸려 있을 때는 세포가 항상성을 위해 기존 질병이 걸려있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는 천연 효소가 세포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거나 그 기능을 무력화하여 전달 효율을 현저히 낮추는 걸림돌이 된다. 낮은 전달 효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외부에서 생성한 대량의 효소를 인위적으로 몸 안으로 넣는 것이다.

그러나 면역체계가 외부물질인 효소에 대해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세포의 환경 변화를 인식하여 촉매 기능을 멈추거나 활성화시킬 수 있으며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인공효소는 천연 효소 문제로 발생한 다양한 질병들을 치료할 수 있다.

인류는 단순한 자연계의 현상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자연계의 보다 복잡한 기능들을 모방하고, 실제 활용 분야의 조건에 맞게 편집하기도 한다. 이 모든게 가능해진다면 영화에서나 보던 생체 내 나노머신이 질병이나 몸의 이상을 스스로 인지하고 치료하는 일이 먼 미래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 소개>정영도 KIST 생체재료연구센터 선임연구원
한양대 화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다.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에서 나노바이오 재료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LG화학 중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KIST 생체재료연구센터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인공효소, 나노입자, 바이오센서 등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5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