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안보가 되다] ①백신서 시작된 자국이기주의, 반도체를 흔들다

코로나가 드러낸 국제분업 한계에 공급 문제가 안보 현안으로 부상
미국발 첨단산업 공급망 재편에 한국 기업 난처·정부도 대응 고민


[※ 편집자 주 =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고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제품에 대한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면서 경제이슈가 새로운 핵심 외교안보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가치외교'를 내세워 중국을 견제하며 기존의 국제분업질서를 대체하는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전략 속에서 한국 외교는 새로운 선택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기업에 대미투자를 요구하면서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은 상황입니다.

경제안보시대의 현재 상황과 전망을 세 편의 기사로 살펴봅니다. ]
최근 외교안보당국 간 대화에서 백신과 반도체 등 보건·경제 현안이 전통적 안보 못지않게 주요 의제로 오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종식의 열쇠인 백신과 첨단 제품·무기 제작에 필수인 반도체의 세계적인 부족 현상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어서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백신과 반도체 같은 핵심 품목 생산을 더는 다른 나라에 의존할 수 없다고 보고 자국 내 생산능력 확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자유무역과 국제분업체계에 기반을 둔 세계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것인데 기존 국제경제 질서에서 성장해온 한국에는 큰 도전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공급망(supply chain)은 각종 원료, 부품, 기술, 기계장비와 숙련된 인력의 확보, 완제품 운송 등 기업이 제품을 생산해 소비자에게 전달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어느 한 기업이 공급망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감당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그간 기업들은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에 집중하고 다른 부분은 외부에서 조달해왔다.

자동차처럼 복잡한 제품의 공급망은 여러 국가에 위치한 수백 개 기업으로 구성되는 데 이러한 국제분업에 기반을 둔 세계 공급망은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를 맞아 한계를 드러냈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자 미국과 유럽에서는 한 장에 몇백 원밖에 안 하던 마스크를 웃돈을 주고도 수입할 수 없었고, 배선 뭉치인 '와이어링 하니스'를 중국에서 납품받던 한국의 현대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기도 했다.

그동안 주요국들은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 공급망의 상당 부분을 맡겼는데 이제는 국가 존립을 좌우할 제품까지 '메이드 인 차이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강해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지난 2월 24일 미국 주도 공급망 재편의 청사진이 될 반도체·전기차 배터리·희토류·의약품 등 4대 핵심 품목에 대한 공급망 검토를 지시하면서 이런 인식을 드러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의료용 가운이 없어 옷 위에 쓰레기 봉지를 뒤집어쓴 의사와 간호사의 끔찍한 경험담을 들었다"며 "국가 비상사태에 국민을 보호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 외국, 특히 우리와 이해관계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에 의존해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핵심 품목 생산을 미국이 주도해야 한다는 인식은 이후 백신은 물론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확인됐다.

미국은 최근 백신 지식재산권 면제를 촉구하긴 했지만, 그전까지는 백신 원료 수출을 사실상 통제하고 '쿼드'(Quad) 국가인 인도 등 미국 대외정책에 협조적인 국가에만 제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바이든 행정부는 6월 중 4대 품목 공급망 검토 결과를 공개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반도체와 배터리 등 핵심 품목의 자국 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되 독자적으로는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부분은 동맹으로부터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려고 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경쟁력을 지키는데 필요한 첨단기술이 중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한국 등 동맹에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바이든 행정부의 행위를 보면 동맹과 지분을 나누겠다는 생각"이라며 "미국이 옛날처럼 모든 신기술을 주도할 능력이 안된다고 판단하고 동맹의 지분을 인정하는 대신 그만큼의 책임과 비용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미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그동안 한국 기업들이 공들여 구축해온 공급망을 흔들고 중국과 불편한 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지만, 한국 정부는 운신의 폭이 크지 않아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부 간 협의 대신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들을 불러 모은 백악관 회의에서 미국 내 투자 확대를 직접 종용했다.

국내 투자 감소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북핵 문제 등 여러 현안에서 미국의 협력이 필요한 정부가 문제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백신과 관련해서도 그간 정부는 국제사회에 '백신 민족주의'를 경고했지만, 강대국이 앞다퉈 백신을 사재기하는 가운데 메아리에 그치고 결국 미국에 손 벌리게 된 형국이다.

정부는 이 같은 글로벌 통상·산업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4월 29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 경쟁이 치열해지는 분위기를 고려해 경제와 안보 부처가 긴밀히 협의해 유관국과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정부 관계자는 "공급망은 이미 국가안보의 핵심 요소가 됐다"며 "국가 안보적 관점과 현실적인 기업 관점을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할 수 있는가가 정부의 고민"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