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자존과 원칙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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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모호성'이 아니라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조 바이든 대통령인 것처럼 보인다. 바이든은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강국인 대한민국 대표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대거 확보했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무려 44조원이 미국 내 생산 기반과 연구 역량 확충에 투자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이 견지해야 할 원칙 밝힌
한·미 정상회담
중국이 반발할 여지 크다지만
이를 빌미로 무역보복 한다면
중국에는 되레 자충수 될 것
최병일 <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
지난해 11월 대선, 도널드 트럼프와 박빙의 대결에서 그의 승리를 결정지은 미국 내 중서부지역, 그리고 상원의원 2명 모두 민주당을 배출한 조지아에 이들 한국 기업의 투자가 집중된다. 작년 민주당 내 경선 초반, 바이든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조지아주 흑인 표였다. 박빙의 상원의원 선거에서 현직 공화당 의원을 제치고 모두 민주당으로 색깔을 바꿀 수 있었던 요인 역시 조직화된 흑인들 표였다. 조지아 상원의원 선거 덕분에 민주당은 백악관과 의회를 모두 장악할 수 있었다.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의회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바이든에게 이들 투자는 일자리, 소득 창출을 약속하는 정치적 승리다. 문재인 대통령과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바이든은 미국에 투자를 약속한 기업을 호명하면서 이들을 일으켜 세워 감사를 표시했다. 동시에 격화되는 미·중 기술패권경쟁에서 중국의 기술굴기를 견제하려는 바이든에게 이들 투자의 국제정치적 의미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다. 바이든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국내 유권자들의 표심, 중국 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그의 승리는 생방송 중계를 통해 미국 내로, 동시에 전 세계로 전파됐다.
트럼프 대통령 이후 격화돼 가는 미·중 패권경쟁에서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 왔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안마다 한국 정부는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 바라보는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이 아니라 너무나 명백한 사안에 대해 좌고우면, 우물쭈물하는 자존과 원칙이 부족한 국가로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적어도 한국이 그런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됐다. 만시지탄의 감을 표시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더 큰 구도에서 보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승자는 대한민국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은 한국이 서야 할 가치와 원칙을 세웠다.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 “한국과 미국은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저해, 불안정 또는 위협하는 모든 행위를 반대하며, 포용적이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지역을 유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우리는 남중국해 및 여타 지역에서 평화와 안정, 합법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상업 및 항행·상공비행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법 존중을 유지하기로 약속하였다. 바이든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대만 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다원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우리는 국내외에서 인권 및 법치를 증진할 의지를 공유하였다”는 대목은 미·중 격돌 와중에서 한국이 지탱하고 견지해야 할 원칙을 밝힌 것이다.그간의 평가는 한국은 우파이건, 좌파이건 집권만 하면 중국 앞에서 작아지는 그런 국가로 인식돼 왔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安美經中)’이라는 패러다임이 미·중 격돌과 상충함에도 여전히 작동원리가 돼 왔다. 그 이면에는 무역과 투자에서 최대 상대국인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번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그런 우려의 목소리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중국은 반발할 수 있겠지만, 이를 빌미로 한국을 겨냥한 무역 보복을 감행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중국의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은 더 미국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기적 경제적 셈법을 벗어나면 더 큰 그림이 보이는 법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강대국 이익의 치열한 각축장인 외교무대에서 한국이 견지할 원칙이 무엇인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셈이다. 강대국의 압력 속에 평생 외교무대를 지켰던 조태열 전 주유엔대사가 퇴임하면서 낸 책 제목, 《자존과 원칙의 힘》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