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현실 몰라도 너무 몰라"…거리 나선 여행업계 '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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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여행업계 '생존권 사수' 국회 앞 피켓시위"아침에 눈을 뜨면 해가 중천이다. 몇 년간 품어왔던 꿈과 내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출근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하루를 시작하자니 이내 텅빈 사무실이 큰 중압감으로 밀려온다. 20년간 오직 한 길만 달려왔는데…지금은 모든 게 낯설고 또 낯설다.
코로나 피해 손실보상법 대상업종 제외에 반발
"의무격리 여행·이동제한 등 사실상 영업제한"
"영업제한·집합금지 업종 만큼 큰 피해 입어"
현실을 잊어보려 책을 들어보지만 금새 악몽같은 현실만 되살아난다. 소주 한 잔에 취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저녁이면 잠이 안온다. 새벽녘까지 멍한 채… 잠이 들라치면 새벽 4~5시, 이미 몇 달 째 시간 개념마저 사라졌다.삶이 너무 힘들고 무기력하다. 언제쯤 예전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젠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 조차 겁나고 무섭다. 소리 내어 웃어본 게 언제인지…기억 조차 없다. 너무 힘들다…."
중소 여행사 '여행지기'의 함수일 대표가 올 1월부터 쓰기 시작했다는 일기의 일부다.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만난 함 대표는 '생존! 중소여행사' 구호가 적힌 붉은 머리띠를 두른 채 코로나 일기를 읽어내려갔다. 전국 중소여행업 비상대책협의회 대변인이기도 한 그는 "모두 다 아는 여행업계의 어려운 현실을 왜 정부만 모르는 것이냐"며 울분을 터뜨렸다.
○또 다시 거리로 나선 여행업계
25일 관광·여행업계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생존권 확보를 위한 피켓시위에 나섰다. 이날 오후 예정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손실보상법 입법 청문회를 앞두고 업계의 절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다. 서울과 인천, 대구, 광주 등 전국에서 모인 여행업계 관계자들은 오전 10시부터 한 시간에 걸쳐 구호와 자유발언을 이어가며 시위를 벌였다.이마에는 붉은색 머리띠, 두 손에는 노란색 피켓과 현수막을 든 시위 참가자들은 "코로나 피해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며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특별고용지원, 특별융자, 재난지원금 그리고 손실보상법 등 정부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지원마다 여행업계는 번번이 소외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박현경 이후엘티에스 대표는 "연간 1800만여 명 외국인 관광객을 데려온 여행사는 그동안 국가 경제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는 얘기냐"며 "여행업도 엄연한 기간산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형섭 스마트트래블 대표는 "20년 가까이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정부가 내라는 세금을 단 한 번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납부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냐"며 억울해했다.시위 참가를 위해 광주에서 올라온 김경옥 강남여행사 대표는 "너무 힘들어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된다는 이들도 많다"며 "정부가 여행업계가 처한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비난했다. 남편과 아들, 딸 등 4인 가족이 함께 여행사를 운영하던 김 대표는 코로나 사태로 가족 전체가 2년 가까이 일자리를 잃고 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온힘을 다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여행업종 손실보상법 대상에 포함해야
국회와 정부를 향한 여행업계의 요구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행업 피해보상이 포함된 손실보상법 제정' '관광진흥개발기금으로 여행업 생존 지원' '신속한 백신접종으로 여행산업 복원' '코로나 종식 시까지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등 이날 요구한 네 가지 대책도 결론은 벼랑끝에 몰린 생존권 확보였다. 여행업계는 이날 "코로나 사태 1년이 지났지만 정부 인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며 김부겸 국무총리와의 면담을 공식 요청했다.국회와 정부가 입법을 추진 중인 코로나 피해 손실보상법에 여행업종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게 여행업계의 주장이다. 집합금지, 영업제한 등 여행업종에 대한 직접적인 행정명령만 없었을 뿐 그 이상의 피해와 불이익을 입었다는 이유에서다. 오창희 한국여행업협회 회장은 "정부는 여행업종이 노래방, 스터디·키즈카페 등과 같이 영업제한 업종으로 지정되지 않아 지원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손실보상 대상에서 제외하려 한다"고 지적했다.여행업계는 정부가 취한 방역조치가 사실상의 영업제한과 다름없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3월 특별여행 주의보에 이어 4월 내려진 무사증 입국 제한과 입국 시 14일 의무격리로 해외여행은 물론 비즈니스 출장 수요까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국·공립시설과 대형버스 주차장 이용제한, 5인 이상 모임금지 조치는 그나마 남아있던 국내시장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오 회장은 "매일 브리핑 때마다 국민들에게 여행과 이동을 자제해달라던 정부의 당부가 여행업계에 대한 영업제한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해당되는 것이냐"며 "기차는 전처럼 운행하면서 여행상품 판매는 금지하고, 4인 이상 여행객은 같은 식당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정부 방역수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뿐 아니라 일관성도 없다"고 꼬집었다.
○업종 특성에 맞는 지원대책 마련해야
이날 시위에 참여한 여행업계 대표들은 정부를 향해 대책마련을 강력히 요구하면서도 "방역조치 완화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전례가 없는 바이러스 대확산의 위급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정부 방역 조치에 적극 협조하는 게 최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다만 그로 인해 입은 피해를 제대로 파악해 보상해줘야 한다는 것이다.시위 현장을 찾은 조정훈 의원(시대전환)은 "정부가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집합금지, 영업제한과 같은 방역 조치를 취하는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방역을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재산권을 침해받은 이들에 대한 충분한 지원과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행정명령서 하나로 피해지원이나 손실보상 업종을 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모든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헌법 제23조에 따라 여행업계에 대한 코로나 피해지원과 손실보상은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창희 회장은 "정부가 90%를 지원해 기업은 10%만 부담하는 고용유지지원금도 실제로는 기업 부담인 4대 보험료를 더할 경우 지원비율이 75%로 낮아진다"며 "상품 기획과 개발을 위한 준비기간이 필요한 서비스업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원기간 중에는 일체의 직원 출근이나 업무를 금지해 영업재개를 준비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로부터 고용유지지원금을 받고 있는 사업체가 지원기간 중 직원을 출근시키거나 업무를 지시하다 적발될 경우 해당 기업은 그동안 받은 고용유지지원금의 5배를 물어내야 한다.
이선우 기자 seonwoo.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