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둥실 날아오른 사랑과 희망의 화가, 샤갈[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마르크 샤갈의 '생일'. 1915, 뉴욕현대미술관
몸도 마음도 한껏 두둥실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마르크 샤갈(1887~1985)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이런 신비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생일' '산책' 등 그의 그림 속 인물들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들의 발은 땅 위에 있지 않고 하늘에 떠 있습니다. '생일'에선 남성이 여성에게 입을 맞추며 몸이 붕 떠 있고, '산책'에선 남성과 함께 산책을 하던 중 여성의 몸이 하늘에 떠 있죠.
마르크 샤갈의 '산책'. 1917~1918, 상트페테르부르크미술관
그림 속 인물들이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는 건 샤갈 작품의 주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들의 상황과 표정에서 그 이유를 금방 눈치챌 수 있는데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하늘을 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덩달아 설레고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샤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과 예술에 진정한 의미를 갖는 단 하나의 색은 사랑의 색이다.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

우리 모두 유한한 삶, 그 캔버스 위에 어떤 색을 칠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때론 우울함과 절망의 색으로, 때론 분노의 색으로 얼룩지기도 하는데요. 샤갈은 하루하루를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삶과 캔버스를 가득 채워나갔습니다.
샤갈의 그림만 놓고 보면 그가 풍족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가난한 노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우여곡절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더불어 지내며 가난과 차별을 이겨내려 노력했습니다. 샤갈의 어머니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그림을 좋아하는 아들을 공립학교에 보내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후 샤갈은 한 후원자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됐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화풍의 작품을 접하고 배웠습니다. 그러면서도 특정 화풍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어냈죠.

여기엔 유년 시절의 추억이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파리를 정말 사랑했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도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르크 샤갈의 '나와 마을', 1911, 뉴욕현대미술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샤갈의 '나와 마을'이란 작품은 마치 신비롭고 따뜻한 꿈속 장면을 펼쳐놓은 것 같은데요. 꿈이 아닌,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담은 것입니다. 그는 "내 작품은 꿈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 추억들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봤던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들에 무한한 상상력을 더해 화폭에 자유롭게 표현했죠. 여기엔 어린 시절 자주 접했던 유대인 설화, 성서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앞서 본 '생일' '산책' 등에서 인물들이 하늘에 떠 있는 것도 설화, 성서 등에서 비롯됐습니다. 이같은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법으로 사랑과 행복의 감정을 담아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실제 샤갈의 마음에도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알고 지낸 벨라 로젠펠트와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샤갈의 집안과 달리 부유했던 로젠펠트 부모님은 두 사람 사이를 반대했지만, 둘은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생일'은 샤갈의 생일에 약혼녀 로젠펠트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오자 황홀함과 환희에 빠진 순간을 담은 것입니다.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 사랑,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그녀는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하지만 샤갈도 유대인들이 겪은 크나큰 역사적 비극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미술학교 교장이 되기도 했지만, 공산주의 교육을 위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됐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샤갈을 제거해야 할 예술가로 꼽기도 했습니다.

샤갈 부부는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간신히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1944년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급성 간염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슬픔에 잠겨 한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샤갈은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고 희망을 품으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1948년 파리로 가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루브르에도 전시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많은 천재 화가들이 사후에야 인정을 받았지만, 샤갈은 생전에도 큰 사랑을 받은 것이죠.
마르크 샤갈의 '생 폴 드 방스의 정원', 1973, 케이옥션
그 인기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에선 케이옥션 경매에 나온 '생 폴 드 방스의 정원'이 42억원에 낙찰됐습니다. 국내 경매에 출품된 샤갈의 작품 중 최고가입니다. 이 작품에도 사랑이 가득합니다. 아름답게 흐드러진 꽃과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크 샤갈의 '에펠탑의 신랑신부', 1938,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
굴곡진 운명에도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대가로 성장한 건 샤갈 스스로 큰 사랑을 품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샤갈이 말년에 살았던 저택 응접실엔 '에펠탑의 신랑 신부'라는 작품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린 작품으로, 로젠펠트가 그의 곁에 있던 때였죠.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고 추억할 줄 알았던 샤갈의 마음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빛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