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7개국 백신여권 시행…'코로나 장벽' 허물어진다

내달 27개 회원국 모두 도입
접종자, 디지털 인증서 사용
자유로운 국경 통행 가능

뉴욕주도 백신증명서 발급
110만명 장소 상관없이 이동

미국 등 23개국, 한국인 無격리
유럽연합(EU)이 코로나19로 꽉 막혔던 국경을 다시 열었다. 27개 회원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을 돕는 통행로를 구축하면서다. 독일 폴란드 등에서는 이달부터 ‘백신 여권’ 소지자가 각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이스라엘, 중국 등도 올해 3월 자국 내 통행을 돕는 백신 통행증을 마련했다. 지난해 3월 11일 코로나19 대유행 선포 후 높아진 국경 장벽이 백신 보급 반년 만에 허물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백신 여권 시범적용 시작한 EU

EU 집행위원회는 1일(현지시간)부터 독일 그리스 폴란드 덴마크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등 7개 국가에서 디지털 코로나19 인증서를 쓸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 인증서는 회원국 간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는 전자문서다. 백신·면역 여권으로도 불린다.코로나19 백신을 맞았거나 진단검사 결과 음성인 사람, 확진 후 완치돼 면역이 있는 사람은 이를 발급받아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다. 디지털 서명이 담긴 QR코드다. 다른 나라의 출입국관리소 등에서 스캔하면 이름, 생년월일, 백신 접종 이력 등을 볼 수 있다. 개인정보는 국가별 디지털 저장소에 보관된다. 원하면 종이로도 발급받을 수 있다.

EU는 지난해 11월 백신 여권 발급 논의를 시작했다. 여름 휴가 시즌인 다음달 1일 27개 EU 소속 국가에서 모두 사용하는 게 목표다. 스위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리히텐슈타인 등 4개국도 EU 소속은 아니지만 참여 의사를 밝혔다.

백신·면역 여권 도입을 발표한 것은 EU가 처음은 아니다. 3월 이스라엘과 중국이 각각 스마트폰 앱 등으로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하는 디지털 인증서를 도입했다. 이스라엘에선 QR코드 형태의 ‘그린패스’를 받은 백신 접종자가 체육관 수영장 교회 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중국은 위챗 앱을 통해 접종 이력을 확인한다. 일본은 종이 형태의 백신증명서를, 미국은 다른 국가 통행을 위한 백신 여권을 발급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이들 인증서는 엄밀한 의미로 보면 여권보다는 통행 허가증에 가깝다. 해당 국가 안에서 자국민의 통행을 돕는 용도기 때문이다. 자국 내 백신 접종률을 높이기 위한 인센티브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 뉴욕주에서 발급하는 백신증명서인 ‘엑셀시어 패스’도 마찬가지다. 뉴욕 내 백신 접종자 910만 명 중 110만 명이 발급받아 공연장 야구장 결혼식장 등을 자유롭게 오가는 데 이용하고 있다. 뉴욕주는 다른 주에서도 엑셀시어 패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협의 중이다.

코로나 재확산·백신 차별 심화 우려도

EU가 백신 여권을 도입하면서 EU 모델이 세계 여권 표준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EU는 권역을 여행하는 다른 나라 국민도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항공사도 여권 도입에 앞장서고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올해 4월부터 대한항공 등 22개 항공사를 대상으로 트래블패스를 도입했다. 코로나19 검사 결과, 백신 접종 이력 등을 토대로 패스를 발급받은 승객은 국경을 오가는 절차가 줄어든다.코로나19로 타격이 큰 여행업계 등에서 백신 여권 도입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백신 여권은 한 국가에서 자의적으로 발행할 수 없다. 각국의 백신 접종증명서나 음성확인서가 여권 형태를 갖추려면 국가끼리 합의가 필요하다. 여러 나라가 서로 발행한 증명서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표준화된 양식은 물론 상호 인증 절차도 필수다.

영국 등 일부 국가와 과학계에서 백신 여권 도입에 반대하는 것도 걸림돌이다. 영국은 국가 간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여권 도입을 미루고 있다. 과학계에선 여권이 또 다른 차별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접종증 있으면 20여 개국 무격리 방문

트래블버블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2~3개 나라가 조건 없이 통행을 허가하는 방식이다. 호주·뉴질랜드가 대표적이다. 다만 이런 방안도 한계는 있다. 이들 나라의 방역 상황이 계속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트래블버블에 합의했지만 갑자기 확산한 코로나19 때문에 시행 시점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여권 대신 각국 정부가 발행한 백신증명서나 음성확인서를 출입국 서류로 대체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는 배경이다. 넓은 형태의 ‘백신 비자’다.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23개 나라가 백신을 맞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격리 절차를 생략했다. 이들 국가 대부분은 세계보건기구(WHO)가 허가한 백신을 모두 인정한다. 2일 승인받은 중국의 시노백 백신을 포함해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얀센 시노팜 백신 등이다. 미국은 주마다 조건이 다르다. 뉴햄프셔·매사추세츠·메인주와 미국령 괌·사이판 등은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승인한 화이자 모더나 얀센 백신 접종자만 자가격리를 면제한다.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 등 60여 개 나라는 코로나19 검사에서 음성으로 확인된 한국인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 터키 핀란드 네덜란드 등 10개국은 백신 접종 이력이나 음성확인서가 없어도 한국인이면 격리 없이 여행을 허용하고 있다.

■ 백신여권·백신비자여권이 국제 신분증이라면 비자는 해당 국가 입국을 허가하는 통행증이다. 백신여권은 국가 간 백신 접종자 인정 자격에 대한 합의를 거쳐야 하고 합의된 구역에서는 차별 없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백신비자는 국가마다 규격과 방식을 다르게 운영할 수 있다. 외국인이 입국할 때 코로나19 음성 확인증이나 각국 정부가 발행한 백신 접종 증명서를 요구하는 것은 백신비자에 더 가깝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