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째 타악기 두드림…이젠 독주자의 길 Do Dream

피플스토리
퍼커셔니스트 박혜지

'박혜지도 콩쿠르 우승했는데
결국 오케스트라 들어가더라'
이런 말 안 나오도록
타악 독주자로 선례 남기고파
퍼커셔니스트 박혜지가 대구 봉덕동에 있는 연습실에서 마림바로 미카엘 자렐의 ‘타악기 협주곡’ 중 한 마디를 연주하고 있다. /오현우 기자
마림바, 팀파니, 스네어드럼, 비브라폰…. 퍼커셔니스트가 한 무대에서 기본적으로 다뤄야 하는 타악기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작품에 따라 수십 가지에 달하는 타악기를 함께 다룬다. 악기 대신 양은냄비나 프라이팬도 박자를 맞추는 데 쓴다. 세상 온갖 사물을 두드려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로 불리는 이유다.

퍼커셔니스트 박혜지(31)는 지난 4월 서울시립교향악단과의 협연 무대에서 무려 17가지 타악기를 연주했다. 대구 봉덕동에 있는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타악기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웬만한 소리는 모두 낼 수 있는 악기군입니다. 실로폰, 마림바 등은 일정한 음계를 갖춰 화음을 낼 수 있어요. 음의 높낮이가 없는 타악기라도 연주자가 북을 찢고 연기를 하는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들을 감동시키죠.”박혜지는 2019년 스위스 제네바 콩쿠르 타악기부문에서 1위와 함께 특별상 2개까지 휩쓸었다. 빼어난 박자 감각과 탁월한 연주력 덕분에 타악기 분야의 새로운 별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그는 국내 클래식 기획사인 더브릿지컴퍼니와 계약을 맺었다. 독주자로서 연주 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의도다. 타악기 전공자의 독주 활동은 이례적이다. 대다수 퍼커셔니스트들은 오케스트라에 입단한다. 독주자를 직업으로 삼기엔 국내 클래식 토양이 척박해서다.

“국내에선 타악기 독주가 생소합니다. 낯설다보니 공연도 드물게 열리고 수익도 적어요. 선례를 남기려고 합니다. ‘박혜지? 걔도 콩쿠르 우승했는데 결국 오케스트라 들어가더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요.”

국내에서 타악기 독주자로 활동하는 건 녹록지 않다. 악기를 종류별로 구입하기도 어렵다. 국내에는 마림바, 비브라폰 등 주요 타악기를 판매하는 곳도 없고 가격도 만만찮다. 마림바는 최소 3000만원, 비브라폰은 1000만원이다. 팀파니를 구하는 데도 최소 1000만원이 든다. 악기를 공연장으로 옮기는 운송비만 400만원을 써야 한다.15년째 타악기를 두드리고 있는 박혜지가 처음 마림바를 산 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였다. 그가 유학했던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에서 폐기하려던 마림바를 중고로 샀다.

퍼커셔니스트라면 기본적으로 연마해야 할 악기는 15가지 정도. 음정에 맞는 금관을 쳐서 멜로디를 내는 악기를 배우는 건 필수다. 마림바와 비브라폰을 중심으로 실로폰, 글로켄슈필, 튜블러 벨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박자를 맞추는 스네어드럼과 팀파니, 심벌즈도 쳐야 한다. 각 문화권의 전통 타악기도 익혀야 한다. 소리가 나는 행위라면 뭐든 한다고 박혜지는 설명했다.

“타악기는 연주 기법이 비슷해 배우는 게 어렵지 않아요. 정해진 틀이 없기도 하죠. 독일에서 공연할 때는 춤을 추다가 가슴팍이나 뺨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박자를 맞추기도 했어요. 음악가지만 연기나 퍼포먼스가 중요한 이유죠.”
대구 출신인 박혜지는 당초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네 살 때 피아노를 처음 배웠지만 가정형편 탓에 중단했다. 중학교 2학년때 어머니의 지인에게 피아노 반주 아르바이트를 해주다 우연히 드럼을 배웠다. 타악기 연주자로 진로를 바꾼 계기다. 경북예고와 서울대 음대를 거쳐 2014년 독일로 떠나 슈투트가르트 음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여기서 만난 마르타 클리마사라 교수의 가르침에 힘입어 박혜지는 국제 콩쿠르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2015년 마림바 국제콩쿠르와 독일 슈파르다 클래식 어워드에서 우승했다. 다음해에는 시카고 국제콩쿠르(3위)와 뮌헨 아우구스트 에버딩 콩쿠르(2위)에도 나갔다.

박혜지는 최근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지난해 열릴 예정이다가 코로나19로 연기된 공연들이다. 지난 1일 제네바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카엘 자렐의 ‘타악기 협주곡’을 스위스에서 초연했다. 다음달에는 스위스 레조데르 페스티벌에 초청받았고, 8월엔 프랑스와 대만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대구=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