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영토와 부여의 풍속 계승한 '황제국' 발해…중국·일본 옛 기록도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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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산책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2) 발해는 한민족의 역사
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을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변조하고,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모든 박물관, 전시관, 역사책, 교과서에서 ‘발해’를 지웠으며, 때때로 ‘발해도독부(都督府)’라고 서술한다.
첫 국호는 ‘고려’로 추정
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과 한민족 계열성은 국호와 주민들 성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727년에 2대 무왕은 유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일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하이(아이누족) 땅에 표착한 24명 가운데 수령인 고제덕 등 8명만 생존했다. 갖고 간 국서(國書)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3대 문왕이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썼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고 기록했으며(《속일본기》),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초기에 파견한 사신단에는 유민으로 정착한 ‘고려씨’들이 포함됐고, 당시 목간이나 그릇, 파편 등에는 ‘고려’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중국과 신라 기록에는 ‘진(振·震)’ ‘발해’ ‘북국’ 등의 용어가 있다. 그러나 중국은 최근 태도를 바꿔 ‘말갈국’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발해인들의 자의식과 자기 발언, 일본의 기록으로 볼 때 첫 국호는 ‘고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발해
발해는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됐다. 《삼국사기》는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 또 발해를 무척 싫어한 최치원은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리를 모아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삼아 나라 이름을 발해라 했다’고 기록해 발해민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알려줬다. 《삼국유사》는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장수인 조영은 성이 대(大)씨이며,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발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의 《구당서》는 ‘(발해) 풍속이 고구려 및 거란과 같다’고 했고,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고 썼다. 중국은 ‘별종’을 강조하면서 다른 종족이라는 듯 주장하지만, ‘고려(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高麗本夫餘別種也)’나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百濟夫餘別種也)’ 등에서 볼 수 있듯 ‘별종’은 갈래 집단임을 표현한 단어다.또 일본인들은 역사책 《류취국사》의 말갈 서술 부분을 인용해 발해의 지배층은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인이라고 주장했고, 한국은 이를 추종했다. 그런데 이는 북만주와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거친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숫자, 관리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소수인 속말말갈(말갈의 한 부족)은 본래 고구려의 구성원이었고, 발해는 이를 계승했을 뿐이다. 당연히 ‘대씨’ ‘고씨’ 등의 고구려 유민들이 주도한 혼합종족체제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