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유튜브만 믿어"…'음모론 늪'에 빠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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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가 키운 '불신사회' 단면 보여준 손정민 씨 사건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손정민 씨(22) 사건이 “진상 규명과 상관없는 음모론과 가짜뉴스로 얼룩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범죄 혐의점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경찰의 공식 입장에 변함이 없는데도 ‘손씨 타살설’ 등을 주장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 수는 3만4000명을 넘어섰다.
'손씨 타살' 주장 카페 회원 급증
친구 폰 주운 환경미화원 고발도
정부·언론 불신 1인 유튜버 늘며
편향된 정보확산 속도 더 빨라져
미국·유럽도 가짜뉴스로 몸살
프랑스선 '백신 괴담' 39% 맹신
유튜브에도 “경찰이 시신을 마네킹과 바꿔치기했다” “경찰이 사건을 덮으려 한다”는 내용의 영상 수백 개가 떠돌고 있다. “정부와 기성 언론을 불신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유튜브를 기반으로 하는 1인 미디어 활성화라는 변화가 맞물리면서 우리 사회의 해묵은 병폐가 또다시 부상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길어지는 수사에 음모론 난무
지난 4월 30일 손씨가 숨진 채 발견된 지 한 달이 넘었다. 경찰은 서초경찰서 강력계 7개 팀을 투입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지난달 27일에는 “범죄 혐의점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이달 5일에는 “실종 당시 손씨와 함께 있던 친구 A씨의 휴대폰에서 혈흔 반응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까지 나왔다. 법조계에선 손씨 사건이 사고사로 종결될 공산이 큰 것으로 본다.일각에서는 “경찰의 초동수사 부실이 음모론을 키웠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온갖 억측과 허위사실이 기승을 부리는 최근의 분위기는 과하다”는 게 중론이다. ‘경찰을 못 믿겠다’는 커뮤니티 ‘반포한강사건의 진실을 찾는 사람들(반진사)’의 회원은 3만4000명이 됐다. 또 다른 단체인 ‘한강 의대생 의문사 사건의 진실을 찾는 사람들(한진사)’은 A씨의 휴대폰을 주운 환경미화원을 점유이탈물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고 밝혔다.
“경찰이 대대적 탐문조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던 휴대폰이 갑자기 나왔다. 경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카페 게시판에선 “폐쇄회로TV(CCTV) 영상이 조작됐다” “손씨는 타살됐다”는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손씨 사건을 다룬 유튜브 채널은 3000개를 넘어섰다. A씨 측 변호인인 법무법인 원앤파트너스는 A씨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한 유튜버 등을 7일 경찰에 고소할 예정이다. 원앤파트너스는 “A씨와 가족의 피해,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SNS 타고 가짜뉴스 확산
가짜뉴스와 음모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와 함께했다. 아폴로11호 달 착륙 조작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에이즈 전파설 등이 대표적이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음모론에 빠지는 이유를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 자신의 생각에 맞는 정보만 믿고 다른 사실은 배척하는 ‘확증편향’, 어떤 결과의 명백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을 때 스스로 이를 빨리 종결하려는 ‘인지 종결 욕구’ 등 때문이라는 것이다.최근엔 SNS를 통해 음모론이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제작되고, 확산한다. 손씨 관련 가짜뉴스 영상도 대부분 개인 유튜버가 만들었다. 지난달 14일 한 무속인 유튜버가 올린 “손씨는 단순 익사가 아닌 확실한 타살”이란 제목의 영상은 조회 수가 50만 건에 이른다. 조회 수 39만 건인 “손씨 타살에 공범이 있다”는 내용의 영상도 기자 출신 유튜버가 제작했다.
SNS에 익숙한 개인은 적극적인 가짜뉴스 소비자이기도 하다. 알고리즘에 따라 자신의 관심사에 맞춰진 편향된 정보만 수용하는 ‘필터 버블’ 현상이 강해지면서다. 반진사의 사례처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관계를 맺거나 의견을 공유하기 쉬워지면서 서로 자신들이 믿는 얘기만 주고받는 ‘반향실 효과’도 커졌다.해외 주요국들도 가짜뉴스와 음모론에 시달리고 있다. 2017년 등장한 미국 극우 집단 ‘큐어넌’은 “미국에 사탄을 숭배하는 거대한 아동 성매매 지하 조직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펴고 있다.
파리정치대학 정치연구소의 지난 1월 조사에 따르면 ‘정부와 제약사가 짜고 코로나19 백신의 위험성을 덮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39%, 이탈리아·독일 32%, 영국에서 3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송재룡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온라인에서 삶을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데다 디지털 문화의 특성인 익명성이 맞물리면서 가짜뉴스가 더 빠르게 퍼지고 있다”며 “자신이 직접 만든 콘텐츠로 수익을 얻을 수 있어 가짜뉴스 생산자도 늘어났다”고 진단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