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듐백 사오면 30만원" 알바, "칠순 셀프선물" 老부인까지 새벽줄
입력
수정
지면A4
'명품 플렉스' 대한민국의 자화상
일상풍경이 된 오픈런
새벽 5시, 캠핑의자 들고 모여
인기백 상품권으로 싸게 사고
되팔면 100만~200만원 차익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루이비통 매장(왼쪽)에서도 소비자들이 건물 바깥까지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https://img.hankyung.com/photo/202106/AA.26564466.1.jpg)
욕망의 ‘설국열차’ 명품 오픈런
![지난 4일 오전 6시께 신세계백화점 본점 샤넬 매장 앞에서 구매 대기자들이 캠핑 의자에 앉아 번호표를 기다리고 있다. /이혜인 인턴기자](https://img.hankyung.com/photo/202106/AA.26564494.1.jpg)
오전 6시 27번이던 번호표는 10시에 105번까지 늘어났다. 갓 결혼한 딸과 사위에게 명품을 사주고 싶다는 60대 노부인부터 한 달 전에 결혼하고 함께 ‘오픈런’ 중인 신혼부부, 하루 일당 10만원을 벌기 위해 서 있는 ‘줄서기 알바’, 명품을 되팔기 위해 모인 ‘리셀러’까지 다양했다.
약 200m 오픈런 줄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리셀러들이다. 이들은 명품시장의 희소성을 이용해 샤넬 인기 상품을 매입한 뒤 시세가 높을 때 재판매한다. 김씨는 “요새 인기있는 샤넬 ‘클래식 미듐’은 100만~200만원 웃돈을 주고 판다”며 “상품권 ‘깡’을 이용해 약 3% 저렴하게 구매해 되팔면 수익이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 상품권과 카드 캐시백 등을 이용하면 500만원당 15만원의 차액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오전 11시께 압구정 현대백화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압구정 현대백화점에 ‘클래식 미듐’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서다. 자리를 뜨면서 그는 “최근에는 작은 사업체까지 꾸리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긴 줄의 중간에는 일반인들이 보였다. 결혼 예물이나 지인의 선물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다. 30대 이씨는 “결혼 4주년 기념으로 남편이 선물을 사준다고 해서 왔다”며 “생각해 둔 물건이 없으면 다른 핸드백이라도 무조건 사겠다”고 했다.오전 9시가 넘어가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장 앞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오픈런을 한다고 해서 원하는 상품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온 70대 신모씨는 “칠순이라고 아들과 딸이 명품을 사준다고 해 직접 돌아다니고 있다”며 “제품을 사고 못사고는 팔자에 달렸다고 해서 ‘팔자런’이라고 한다”고 했다. 벌써 아홉 번째 새벽 줄서기라고 했다.
세계 7위로 커진 한국 명품시장
국내 명품시장은 신분 상승욕과 과시욕, 열등감, 모방심리 등 다양한 심리를 먹으며 성장하고 있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명품시장은 지난해 세계 7위 규모로 올라섰다. 한국 명품 매출은 작년 약 13조9000억원으로 독일을 넘어섰다.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서구권·일본 명품 시장이 20% 이상 감소할 때 한국시장은 코로나에도 상대적으로 성장했다.해외 명품업체들도 국내 명품 열기에 놀란 모습이다. 오랜 기간 명품업계에 몸담아온 한 담당자는 “이런 명품 열기는 20년 만에 처음”이라는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국내에서 시계 신제품을 론칭한 한 명품업체 관계자는 “한국에선 스테디셀러는 기본이고 최신 제품도 들여놓는 즉시 다 팔려버린다”며 “매출 증가 속도에 놀랄 정도”라고 했다.1~2년에 한 번 올리던 명품가격도 1년에 4~5번씩 인상하고 상승폭도 5~6%에서 10%대로 커졌다. 그래도 명품 매장은 항상 미어터진다. 가격을 올리기 전에 구매하려는 사재기 열풍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명품은 가격이 상승하더라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제품군이 한정적”이라며 “이 때문에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들이 구매를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백화점 업계도 명품수요 증가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한 백화점 명품 바이어는 “코로나19 이전 주 고객층이 30~40대였다면 현재는 20~30대가 주도하고 있다”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적 특성 때문에 국내 명품시장은 계속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배정철/민지혜 기자·이서영/이혜인 인턴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