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마네[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한 화가의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다른 그림보다 높은 자리에 걸렸습니다. 너무 잘 그려서였을까요. 사람들이 감탄하며 작품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 했기 때문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관람객들은 작품을 보며 "썩은 그림"이라며 비난했죠. 그러면서 전시장에 갖고 온 우산이나 지팡이로 그림을 찢어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높이 걸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꽤 험악했던 것 같습니다. 분노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그림 앞에 경호원들이 배치될 정도였죠. 이 작품들을 그린 주인공은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1832~1883)입니다. 지금은 '아버지'라는 타이틀까지 갖고 있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시선은 정말 싸늘했습니다. 마네의 대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는 미술사에서 가장 큰 비난을 받은 작품들로 꼽힙니다.

사람들은 대체 왜 그토록 분노했을까요. 그럼에도 마네가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마네의 삶과 작품 세계를 함께 살펴보실까요.
마네는 프랑스 상류층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법무부에 다녔고,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이었죠. 덕분에 어릴 때부터 풍요롭게 지내며 다양한 문화 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아버지는 법학을 전공하길 원했는데요. 그는 아버지와 타협을 해 해군사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탈락하면서, 결국 원래 하고 싶어 했던 미술을 배우게 됐습니다.

이후 그는 고전주의 기법을 가르쳐주는 화실에 6년 동안 다니며 열심히 배웠습니다. 미술 여행을 떠나 많은 고전 작품들을 보고 익히기도 했습니다. 마네의 태생부터 미술을 배우는 과정까지 살펴봐도 그의 작품들이 그토록 비난을 받은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잘 자란 상류층 자제로서 당시 주류였던 고전주의 화풍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마네의 그림은 반전 그 자체입니다. 신화, 성경 등에 나오는 인물을 아름답게 화폭에 담았던 기존 방식을 완전히 뒤엎었죠. '풀밭 위의 점심식사'엔 완벽한 몸매를 가진 여신이 아닌 배 나온 여성이 나체로 앉아 있습니다. 평범한 현실의 여인의 누드를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이죠. 게다가 그 주변엔 술병이 나뒹굴고 있으며, 여인의 곁엔 두 남성이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들의 뒤엔 또 다른 여인이 몸을 씻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부르주아 신사들이 매춘부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겁니다. 고귀함에 가려진 위선과 도덕성 문제를 적나라하게 담은 것이죠. 이를 본 사람들은 외설적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1863, 오르세 미술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우피치 미술관
2년 뒤 출품된 '올랭피아'는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그림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패러디한 건데요. 여기에도 매춘부가 등장합니다. '올랭피아'라는 제목 자체가 당시 매춘부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도 남성 손님이 보낸 것이죠. 마네는 왜 이런 그림들을 그렸던 걸까요. 고전주의 기법을 배웠던 그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었던 걸까요. 마네는 <악의 꽃>을 남긴 시인 샤를 보들레르, <목로주점> 등을 쓴 소설가 에밀 졸라와 가깝게 지내며 세상을 새롭게 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신들의 이상적인 미(美)를 좇기 보다, 파리의 거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동시대의 인물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게 된 것이죠. 그는 스스로 "나는 남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것을 그린다"고 말했습니다.

마네의 작품들이 비난을 받았던 이유는 외설적이라는 점 말고도 또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덧칠을 제대로 하지 않은 미완성의 작품처럼 보였는데요. 사실은 완성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법을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이전엔 화가들이 캔버스 전체에 바탕색을 칠하고 나서 그 위에 물감을 하나씩 덧대어 칠했습니다. 마네는 이 방식에서 벗어나 바탕색 없이 즉흥적으로 색을 칠했습니다. '단번에' 라는 뜻을 가진 '알라 프리마(alla prima)' 기법입니다. 덧칠을 하지 않으니 거친 붓 자국도 그대로 남았죠.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은 미완성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연성과 즉흥성이 부각된 생동하는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원근법도 해체했는데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다시 보면, 가장 뒤에 있는 여성이 근처에 있는 작은 배와 비교했을 때 크게 그려졌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원근법을 지키지 않은 건 당시 일본에서 수입된 도자기를 싸고 있던 포장지의 영향입니다. 마네를 비롯한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그 포장지에 그려진 일본 민화 '우키요에'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키요에엔 원근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는데요. 평면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강렬한 원색을 사용해 깊은 인상을 남겼죠. 마네는 이를 적용하며 원근법에서 과감히 벗어났습니다.

주류를 거스르는 작품들을 그렸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명성과 인지도를 높이는 데 무관심했던 건 아닙니다. 마네는 살롱전에 끊임없이 출품해 이름을 알리려 했습니다. 언젠가 세상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확신했죠.

실제 많은 비난에도 그의 명성과 인지도는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뜻을 함께 하는 젊은 화가들도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이죠. 그렇게 미술사에 길이 남을 인상파가 탄생하게 됐으며, 마네는 1881년 마침내 살롱전에서 입상을 하고 훈장도 받았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2, 코톨드 갤러리
아쉽게도 그는 매독에 걸려 51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지막 작품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완성했습니다. 그가 늘 바라보고 담고자 했던 파리의 자화상을 독특한 시점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술집은 당시 파리의 많은 유명 인사들이 몰렸던 곳입니다.

그런데 마네의 작품 속에 그려진 종업원 여성의 모습은 다소 우울해 보입니다. 여성의 뒤에 있는 거울에 비친 사람들은 왁자지껄해 보이지만, 여성은 그들과 동떨어져 소외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거울엔 이 여성의 뒷모습과 함께 한 신사의 모습도 보이는데요. 당시 종업원 여성들이 일부 매춘을 하던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현실을 응시하고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던 마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할 때에도, 친구 보들레르와 졸라는 마네의 도전을 응원했습니다. 졸라는 이렇게 극찬했습니다. "새로운 예술이 태어났다. 모든 예술가가 마네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의 말처럼 마네가 걸어간 '동시대성'의 길은 이젠 모든 예술가의 길이자 숙명이 됐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