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삼중당문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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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2
박상규 < 중앙대 총장 president@cau.ac.kr >고등학교 입학 후 내가 누군지, 또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등 자아정체감에 대한 혼란과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한동안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채운 상상의 주제는 주로 책에서 선택했다. 종로에 있는 서점에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기둥 옆 선반에 삼중당문고에서 발간한 책 100여 권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삼중당문고는 동서양 고전문학 중심이었고,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문고판이란 특징이 있어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어느 날 번호순으로 정리된 삼중당문고 서적을 순서대로 다 읽어봐야겠다는 도전의식이 생겼다. 1번 《성웅 이순신》, 2번과 3번 이광수의 《흙》, 6번과 7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10번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13번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14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번민》, 25번과 26번 톨스토이의 《부활》 등을 읽기 시작했다. 글에서 배워가는 보람과 즐거움이 컸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루하고 끝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결국 1년여 기간 서점에 비치돼 있던 100여 권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대충 넘어간 책도 있었지만 완독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이 컸고,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기억나는 책은 57번 김형석 교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였다.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삶의 목적과 가치 등에 대해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제시해주면서 인격의 성장과 선한 인간관계, 자신을 양보하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신의 노력보다도 시간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글에 공감하지 못하는 나이였지만,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나갈 힘을 얻은 것도 같다.
시간이 흘러 배움과 경험이 쌓여가던 때 미치 앨봄 교수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게 됐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통해 배웠던 삶의 교훈을 이 책을 통해 대부분 다시 만나게 되면서 20년 전보다 훨씬 많이 공감하고 이해하는 성숙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스스로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누가 도움을 주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질문은 스스로 정리해야 한다. 책 읽기가 중요한 이유는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 더해 다른 사람의 경험도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질문에 대처하는 삶의 태도 및 방식을 배울 수도 있다.
‘과거의 운명적인 것을 두려워 말자. 그것들 때문에 약해지지도 말며 스스로의 무능과 환경을 슬퍼하지도 말자. 오직 우리에게는 과감한 혁신, 신념, 꾸준한 노력이 있을 뿐이다’라는 김형석 교수의 격려 이야기,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야. 진정한 관계가 중요해’라는 앨봄 교수의 이야기는 내가 두려움 없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