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넘어 해바라기와 별이 된 고흐[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1889, 오르세 미술관
한 남성이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멋진 미술관 모습에 감탄하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전시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 놀란 듯 멈춰 섭니다. 자신의 그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죠.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고흐는 자신의 작품에 빠져든 관람객들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영국 BBC 대표 드라마 '닥터 후' 시즌 5에 나오는 '반 고흐 편'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회차로 꼽힙니다. 여기엔 고흐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간다는 설정이 나오는데요. 미래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에 감격하는 고흐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왈칵 눈물이 납니다.

그의 생전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더욱 애처롭게 느껴지죠. 고흐가 평생 동안 판 그림은 데생화 한 작품뿐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샛노란 해바라기에도, 쏟아지는 별들에도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암흑 같은 터널을 걸어야만 했던 그에게 뒤늦게 건네는 작은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흐의 자화상, 1889, 오르세 미술관
이젠 전 세계 사람들이 고흐와 그의 작품을 사랑합니다. 그만큼 그의 삶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인생을 짧게 요약한다면,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가 했던 얘기 두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사로는 고흐를 처음 보고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이 남자는 미치게 되거나, 시대를 앞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두 가지 모두를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누구보다 격정적이었고, 그렇기에 시대를 앞서간 화가 고흐의 삶과 작품 세계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네덜란드 출신의 고흐가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27살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배우고, 재능을 갈고닦아온 다른 유명 예술가들과 사뭇 다르죠. 그렇다고 고흐가 그림과 완전히 거리가 멀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림을 좋아해서 16살 때 큰아버지의 소개로 화랑에서 화상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손님들과 자주 다퉜고, 결국 해고됐습니다.

이후 목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그대로 종교인이 될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여기서도 불화를 겪으며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다 그의 뒤를 이어 화상으로 일하던 동생 테오의 제안으로 그림을 배우게 됐습니다. 고흐와 테오의 돈독한 형제애는 유명하죠. 테오는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의 형을 다독이고 응원했습니다.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었던 형을 위해 물질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고흐는 부푼 가슴을 안고 작품 활동에 열심히 임했습니다. 10여 년 동안 1000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을 정도입니다. 처음엔 장 프랑수아 밀레처럼 농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충을 캔버스에 담았는데요. 이때까지만 해도 주로 어두운 색채로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러다 1886년 파리로 가며 화풍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밝고 강렬한 색을 많이 사용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이죠. 2년 후 따뜻한 남부 지방의 아를로 이사하면서, 고흐만의 화풍이 만들어졌습니다. 남프랑스의 눈부신 태양과 아름다운 풍경은 그에게 큰 영감을 줬죠.
고흐의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1853년, 크뢸러뮐러미술관
낮이면 태양 아래 들판에서, 밤이면 카페에서 붓질을 했던 고흐. 하루 종일 밖에서 작업을 했지만, 그가 그린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고흐는 자신의 내면에서 격렬하게 꿈틀대는 감정들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작품들에 남아있는 거친 붓 자국은 곧 그 내면의 흔적인 셈이죠. "나는 내 그림을 그리는 꿈을 꿨다. 그리고 비로소 내 꿈을 그렸다."

내면의 감정을 그렸지만, 그의 작품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형태를 그릴 때 실제와 최대한 유사하게 표현하려 노력했기 때문이죠. 이를 위해 드로잉 연습도 열심히 했습니다.

여기서 무한한 '반복'의 힘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흐는 자신의 창작 과정이 똑같은 구도를 그리고, 또다시 그리는 반복 그 자체라고 했습니다. '해바라기' 연작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해바라기의 형태와 색채를 조금씩 달리해 재차 그렸습니다. 위대한 작품은 이 반복의 과정에서 나오는 법인 것 같습니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페이지를 39번이나 고쳐 쓴 것처럼 말입니다.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 1888, 뮌헨노이에피나코텍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 1888, 런던내셔널갤러리
고흐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바라기, 그리고 별은 고흐의 영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상입니다. 해바라기는 고흐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는 아를에서 화가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테오에게 부탁해, 동료 화가 폴 고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죠. '해바라기' 연작은 그가 고갱과 함께 할 일상을 기대하며 그린 작품입니다. 샛노란 해바라기엔 그 설렘과 기쁨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두 달도 되지 않아 고갱과 불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크게 다퉜고,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고갱은 그에게 질려 떠났죠.

이후 정신병원에 들어간 고흐는 별을 그렸습니다. 그에게 별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놓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그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언제나 나를 꿈꾸게 만든다"라고 말했죠.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 1년 전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습니다. 작품을 보면 밤하늘의 별들이 스스로를 마음껏 뽐내며 빛의 축제를 여는 것만 같습니다. 왼쪽에 그려진 사이프러스 나무는 그 축제에 닿고 싶은 듯 높이 뻗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흐는 37살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잇딴 극단적인 선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흐'하면 '불안' '좌절'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데요.

오히려 고흐가 강하게 품고 있었던 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언젠가 내 그림이 내 생활비와 물감 가격보다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기다림은 길고 지난했지만, 그의 믿음처럼 사람들은 그 진가를 알아보게 됐습니다.

드라마 '닥터 후'의 고흐 편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 합니다. 미래로 간 고흐는 오르세 미술관의 도슨트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고흐는 찢어질 듯한 고통을 예술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승화시켰습니다. 자신의 걱정과 고통을 즐거움과 환희로, 거대한 우리의 세상으로 표현한 건 고흐 이전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작품은 나오지 못할 겁니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도 고흐가 이 얘기를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고통을 넘어 고흐가 품었던 벅찬 환희와 희망. 이 감정들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한 송이의 해바라기로 피어나고 하나의 별이 되어 빛나고 있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