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뿌리를 찾아 그 품에
입력
수정
지면A36
손병환 < 농협금융지주 회장 jjgr@nonghyup.com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이다.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노래하고 있어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진정 말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를 여러 번 곱씹다 보면 그 무게와 깊이를 가늠하기가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겠지만, 필자에게는 ‘지금까지 있게 해 준 것, 앞으로 있게 해 주는 것’이란 의미로 다가왔다. 어떤 결과를 가져온 직간접적 원인을 뛰어넘어 아주 근원적이고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됐다.138억 년 전 빅뱅은 우주, 우리 은하계, 태양계, 지구 생성의 근본 요인이고 미래의 열쇠 역시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 비밀의 문을 열어 당면한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려고 끊임없이 연구한다. 이것은 과학적 난제를 해결하려는 직업적 소명임과 동시에 인류를 포함해 모든 존재의 뿌리를 알고자 하는 본능적 탐구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에는 ‘생명체로서 살아 있음과 주체로서 살아 나아감’이 어우러져 있다. 라틴어로 human(인간)과 humilis(낮다)의 어원은 humus(땅)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 삶의 뿌리에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자연 교감이 땅에 씨를 뿌리고 먹거리를 거두는 행위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살아 나가기 위한 덕목으로 자신을 낮추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가르쳐준다.
한류는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시대 아이콘 중의 하나가 됐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 넓어지고 있다. 갑자기 우연히 그렇게 됐을까? 아니다. 우리는 5000년 이상 노래와 춤을 한껏 즐기고 멋과 흥을 함께 나눠온 뿌리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둔 우리 문화만의 독특한 가치와 매력이 초연결 글로벌 시대를 맞이해 다양한 사람의 마음을 끌고 있다.지금 한 사람으로서 나를 있게 한,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뿌리를 찬찬히 생각해본다. 논개의 의로움과 유등 축제의 화려함을 품은 채 유유히 흐르고 있는 진주 남강이 내 가슴속에서는 넉넉한 어머니 품으로 다가온다. 저 깊은 뇌리에 새겨진 진주의 맛이 문득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느껴질 때면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뿌리는 어떻게 될지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무엇을 향한 첫 움직임에서 뻗어 나온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알기 어렵다고 해서 가볍게 지나칠 것은 아니다. 뿌리를 모르고서 지금과 여기를 말할 수 없고 미래를 향한 돛을 올릴 수 없다. 이제 잠시 멈추고 나와 우리를 키워낸 뿌리를 찾아 그 품에 흠뻑 안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