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수 KB생명 사장 "밀어내기식 영업으론 한계…상품 싹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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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탐구“언제까지 고리타분하게 영업할 겁니까. 이대로는 절대 1등이 될 수 없습니다.”
종신보험 '7년의 약속'으로 생보시장 돌풍
최고 재무통 "숫자 바꾸려면 변화를"
"다 보이는 상품 만들어라"
굵직한 M&A 때마다 큰 역할
허정수 KB생명 사장은 2018년 취임하자마자 임직원을 모아놓고 이같이 말했다. 당시 KB생명은 국내 1등 금융그룹인 KB금융지주의 일원답지 않게 보험업계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했다. 자산 순위 17위, 수입보험료에서 보험금과 사업비를 뺀 보험손익은 무려 1230억원 적자였다.KB금융의 대표적인 재무통이자 인수합병(M&A) 전문가로 통하는 허 사장이 구원투수로 투입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옛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인수의 주역이기도 한 그는 늘 ‘숫자’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숫자 몇 자리를 바꾸기 위해선 그보다 훨씬 큰 혁신이 필요했다. 고비용의 전속채널 영업을 폐지하고 소비자 지향적인 상품 및 채널로 승부하기로 했다. 상품 경쟁력이 커지자 별다른 마케팅 없이도 법인보험대리점(GA)에서 KB생명 상품을 앞다퉈 팔기 시작했다. 허 사장은 지난해 월납 환산 초회보험료(CMIP) 545억원(업계 5위)을 달성하며 보험손익 876억원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이타적 행위가 최선의 결과를”
1960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허 사장은 평범한 시골 소년이었다. 광양만은 당시 김을 양식하는 뻘밭이었다. 어린 시절 허 사장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들어가 김을 뜯거나, 가족의 농사일을 도왔다. 평화롭던 공동체는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허 사장은 “짧은 시간에 마을이 해체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찰하게 됐다”며 “이타적인 행동이 모여야 바람직한 사회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그때 형성된 신념”이라고 말했다.대학원을 졸업한 뒤 주택은행(현 국민은행)에 입사한 건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별 고민 없이 들어온 회사였지만, 그는 재무·기획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은행 생활 대부분을 이 분야에 몸담았다. 당연히 회사의 부침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자산부채종합관리시스템(ALM) 개발, 주택·국민은행 합병 후 통합(PMI) 작업,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KB금융지주 출범, 2014년 LIG손보 인수, 2016년 현대증권 인수, 지난해 푸르덴셜생명 인수 등에 이르기까지 그룹에 큰 장이 설 때마다 그는 최전방에 서 있었다.가슴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다. 허 사장은 “지주 출범 당시 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계열사 주식을 처분해야 하는데, 금융위기 직후인 탓에 금융사 주식을 사려는 곳이 없어 주요 기업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읍소했다”며 “오랜 기간 설득한 끝에 포스코 SK 등 대기업과 주식 스와프(교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재무관리부장을 맡았던 2008년 KB금융이 처음으로 국내 금융지주 시가총액 1위 자리를 신한금융에 내줬던 일은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숫자’에 골몰하던 허 사장의 시야를 넓혀준 것은 영업 현장이었다. 입사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맡은 지점 영업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대낮에 사무실 밖에 나간 적이 드물던 그에게 생소한 경험이었다.“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종일 사람을 만나고, 기업을 찾아다니는 데 시간을 썼습니다. 영업 현장을 누비면서 그동안 시야가 참 좁았다는 생각을 했죠.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영업이야말로 지속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상품도, 채널도 눈에 보여야”
자타공인 재무통인 허 사장이 취임하자 금융권에선 그가 다른 생보사 M&A를 맡을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KB금융은 보험 포트폴리오를 키우기 위해 생보사 인수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허 사장은 KB생명 자체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우선 전속 설계사인 금융컨설턴트(FC) 채널을 과감히 없앴다. 허 사장은 “전속 채널을 유지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임차료 관리비 교육비 등 고정비를 고려했을 때 장기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고비용 구조를 바꾸고 다른 채널의 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설명했다. 핵심 판매 인력은 다이렉트마케팅(DM) 채널로 흡수했다.대신 좋은 상품을 개발해 GA와 방카슈랑스(은행+보험) 채널에서 승부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허 사장은 “‘이타적인 행위가 사회를 바꾼다’는 게 오랜 신념”이라며 “가치를 판매원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돌려주는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정공법’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그렇게 나온 상품 중 하나가 2019년 출시한 종신보험 ‘7년의 약속’이다. 가입 후 7년이면 납입보험료 원금 이상의 해지환급금을 무조건 보장해주겠다는 게 핵심이다. 일반적인 상품이 20년 안팎을 유지해야 하는 것을 고려하면 획기적인 조건이었다. 사업비를 대폭 축소하고 같은 기간 환급금을 높였다. 고객이 이름만 듣고도 직관적으로 내용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혁신은 성공적이었다. 사업비를 줄이는 데 대한 내부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설계사들 사이에서 ‘좋은 상품’이라는 입소문이 났고 GA 채널 판매가 크게 늘었다. 2018년 KB생명의 GA 채널 판매 순위는 16위에 그쳤으나 올해 단숨에 3위권으로 도약했다. 지난해 11월에는 GA 채널 매출총액이 월납보험료 기준 21억2800만원을 기록, 생보업계 1위로 치고 올라가기도 했다. 계약유지율은 같은 기간 84%에서 93%로 올랐다.
허 사장은 “GA 채널에 주는 수수료율은 낮췄지만 매출 증가로 지급수수료가 늘면서 상생모델이 확립됐다”며 “누구나 알 수 있는 투명한 보험 상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달 초 출시된 ‘알기 쉬운 종신보험’도 본인이 어느 시기에 얼마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지 투명하게 공개하자는 취지로 설계했다는 설명이다.
“영속 가능한 기업으로 도약”
KB금융은 지난해 푸르덴셜생명을 품었지만 당분간 KB생명과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를 유지하기로 했다. 두 회사가 합쳐지면 단숨에 업계 6~7위권 대형 보험사로 도약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 KB생명의 기초체력을 튼튼히 하는 게 허 사장의 목표다. 디지털 판매망을 지속적으로 키워 장기 경쟁력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사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가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이 영속하려면 결국 돈을 벌어야 해요. 존재감 없는 작은 계열사가 아닌, 꾸준한 수익과 가치를 창출하는 탄탄한 회사로 키워나갈 겁니다.”
모바일·비대면으로 승부…"2030 사로잡을 것"
가성비·편의성 모두 공략하는 '허정수호'
‘허정수호’의 또 다른 핵심 공략층은 디지털·비대면에 익숙한 2030세대다. KB생명은 이들을 붙잡기 위해 혁신적인 아이디어 상품으로 승부, 성과를 냈다. KB생명이 2018년 말 선보인 ‘착한 저축보험’이 대표적인 사례다.KB생명은 2015년 온라인 보험 채널을 출범했지만 홍보·마케팅 부족, 소비자 외면 등으로 실적이 답보 상태에 놓였다.
허 사장은 2018년 1월 취임 이후 디지털 채널 활성화를 위해 철저하게 2030세대 취향에 맞춰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높은 상품으로 승부해보자는 의견을 냈다.
이에 따라 대면 판매 채널인 은행 방카슈랑스를 모바일, 비대면 판매로 전환하기 위한 모바일 전용 연금상품을 출시했으며 이 상품은 계열사인 국민은행뿐만 아니라 하나은행, 농협은행 등 타사에서도 판매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올해 6월에는 모바일 전용 변액연금으로 상품 라인업을 확대하기도 했다. 디지털 채널에서는 생명보험회사 가운데 가장 보험료가 저렴한 ‘착한 정기보험’을 내놓으면서 별다른 홍보 활동 없이도 ‘고객이 먼저 찾아오는 상품’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는 평가다.
이 상품은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서만 가입할 수 있고 인스턴트 메신저에 익숙한 젊은 층에 맞춰 청약 과정을 대화형으로 구성해 편의성을 높였다.
그 결과 2017년 295건에 불과하던 디지털 보험 가입 건수는 2019년 9077건으로 30배나 급증했고 착한 저축보험 판매가 종료된 지난해에도 4000여 건을 기록했다.
KB생명은 올 1분기에도 디지털 마케팅 채널을 통해 116억3300만원에 달하는 초회보험료를 거둬들였다. 전년 동기(2억2700만원) 대비 5000% 이상 늘어난 수치다. 전체 생보사의 디지털 채널 초회보험료(173억5600만원)의 67%를 독식한 셈이다.
KB생명 관계자는 “가성비 높은 상품을 디지털 채널에서 판매하고 이에 따른 비용 절감분을 상품 경쟁력 제고에 투입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허정수 사장은△1960년 전남 광양 출생
△1979년 광주제일고 졸업
△1986년 동국대 경제학과 졸업
△1990년 주택은행 입행
△2001년 핀란드 헬싱키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MBA)
△2008년 국민은행 재무관리부장
△2015년 KB손해보험 부사장(CFO), 국민은행 재무본부장
△2016년 KB금융지주 최고재무책임자(CFO)
△2018년~ KB생명 대표
이호기/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