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적 인플레' 베네수엘라, 또 화폐 개혁

3년 만에 다시 리디노미네이션

내달 화폐단위 '100만 대 1' 축소
최고액권으로 커피 한잔도 못 사

좌파 집권 22년…빈국으로 전락
전문가 "실질 대책없인 효과 없어"
1999년 우고 차베스 이후 22년째 ‘좌파 독재’가 이어지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3년 만에 화폐 단위를 대폭 축소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다. 하루가 다르게 뛰는 물가를 잡을 방법이 없어서다.

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다음달께 볼리바르 화폐 단위에서 숫자 ‘0’을 여섯 개 빼는 100만 대 1의 화폐 개혁에 나설 계획이다. 현재 321만9000볼리바르 수준인 1달러가 하루아침에 3.2볼리바르로 바뀐다.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살인적이란 평가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8년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6만5370%, 2019년엔 1만9910%에 달했다. 작년 2360%로 다소 진정됐으나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는 훨씬 높다는 지적이다. 지폐 발행 비용이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기업들 역시 회계 처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번 화폐 개혁이 성공할 가능성은 작다는 분석이 많다. 물가 급등에 맞서기 위해 수차례 리디노미네이션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는 2008년 1000 대 1, 2018년 10만 대 1 비율로 화폐 가치를 떨어뜨렸다.지난 3월엔 역대 최고액권인 100만볼리바르까지 발행했지만 현재 가치는 미화 32센트에 불과하다. 최고액권으로 커피 한 잔을 살 수 없다. 이날 기준 달러·볼리바르 환율은 달러당 324만2264볼리바르로 1년 전(20만5476볼리바르)보다 크게 상승했다.

컨설팅업체 신테시스 피난시에라의 타마라 에레라 연구원은 “실질적인 경제 안정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백약이 무효”라며 “수년 내 또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원유 매장량 세계 1위의 자원 부국인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집권 이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군인 출신인 차베스는 산업 국유화와 무상 복지를 통해 국가 자생력을 무너뜨렸다. 2013년 차베스가 암으로 사망하자 정권을 이어받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차베스의 정치적 아들’을 자임했다. 석유산업 국유화와 과도한 무상교육, 의료복지 정책을 이어갔다.마두로가 강압적으로 권력을 잡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베네수엘라에 전방위적인 제재를 가했다. 미국은 마두로 부부와 측근들의 금융거래를 제한하고, 자국 기업에 베네수엘라와의 거래를 금지했다. 원유의 미국 수출길이 끊기면서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은 1940년대 수준으로 감소했다. 마두로 정권은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화폐를 무한정 찍어냈다. 초(超)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경제는 회생 불능 상태에 빠졌다.

베네수엘라의 국가경제 규모는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IMF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전년 대비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2014년부터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한 작년에는 -30%를 기록했고, 올해는 -10%가 예상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전체 인구의 3분의 1은 심각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 최근 6년간 국민 5명 중 한 명(560만 명)이 조국을 떠났고, 국민 3분의 1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전 국민의 평균 체중이 10㎏ 이상 줄었다는 통계도 있다. 여기에 전국적인 범죄 조직 확산 등 사회적 문제까지 겹치면서 국민 대다수가 빈곤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조재길 특파원/박상용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