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탄으로 그려낸 無心

소나무든 산길이든
뭐로 보이든 어떠한가
당신이 보는 게 정답인 것을

황인기 목탄 그림 전시

7일부터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서
추상과 구상 넘나드는 그림에
자유분방한 글·여백의 미 조화
황인기 작가가 서울 이화익갤러리에 전시 중인 작품 ‘무제’ 를 설명하고 있다. 짚을 끓인 물로 염색한 광목천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성수영 기자
‘봄이 오면 마음이 자꾸 밖으로 나갑니다. 2014 인기.’ 노란빛을 띤 종이 위에 목탄으로 무심하게 그려진 선들과 쉼표처럼 보이는 형상 사이에 이런 글귀가 써 있다. 비뚤배뚤한 글씨가 마치 아이가 쓴 것 같다. 심지어 세로쓰기로 시작한 글은 아래 여백이 모자라서인지 도중에 가로쓰기로 바뀐다. 하지만 이런 허술함이 봄바람을 타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작가의 천진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동양화풍의 그림과 자유분방한 글, 여백의 미가 조화를 이룬 황인기의 드로잉 ‘무제’(2014)다.

서울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황 작가(70)의 드로잉 등 작품 30여 점을 소개하는 ‘황인기 목탄 그림’ 전시가 7일 개막한다. 황 작가는 크리스털과 실리콘, 레고 블록과 홀로그램 필름 등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다양한 매체로 고전 산수화를 재해석해 표현한 ‘디지털 산수화’로 유명하다.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고 2003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해 ‘국가 대표’로 인정받는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대작을 주로 발표하던 그가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30여 년간 그린 드로잉을 들고나왔다. 떠오르는 상념이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자유롭게 그린 뒤 생각나는 글귀를 덧붙인 문인화 형식의 작품들이다. “큰 작품을 할 때는 자식 키우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에요. 먹이고 입히고 버르장머리 가르치느라 애도 먹고 힘도 들지요. 드로잉을 그릴 때는 손주를 보는 기분입니다. 졸리다면 재우고 놀자면 같이 놀아주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드로잉 중에는 한옥과 석탑 등 사물을 단순화한 형상을 그린 것도 있고, 아예 추상적인 형태만 덩그러니 배치된 작품도 있다. 찌그러진 원과 함께 ‘부부족(不不足)’이라고 쓴 작품 ‘무제’(2011)가 대표적이다. 말 그대로 ‘부족하지 않다’는 뜻으로, 욕심을 내려놓고 자신을 긍정하는 안빈낙도의 정신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오려 붙인 홀로그램 필름이 등장하는 작품들도 있다.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그림과 반짝이는 오브제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다.황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미사여구로 꾸미지 않는다. 되레 작가의 의도를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허연 종이를 놓고 바라보면 모양이 보이고 생각이 납니다. 그걸 그린 뒤 글을 붙여요. 꾸밈없이 속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토해내는 거죠. 나도 그림을 그린 뒤 이게 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많아요. 관객들이 작품을 보고 자유롭게 떠올리는 생각이 정답이라는 얘기죠.”

작가는 “아무렇게나 그렸다”고 하는데 작품들은 균형과 여백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재치있게 그림과 어우러지는 글귀도 미소를 자아낸다. ‘무제’(1999)에는 ‘소나무면 어떠하리 山길이면 어떠하리…’로 시작하는 글이 적혀 있다. 그 표현 그대로 그림은 소나무로도, 산길로도 보인다.

작품이 걸린 방식도 독특하다. 가로 110㎝, 세로 80㎝ 크기의 드로잉 작품들이 여백 없이 격자 모양으로 서로 붙어 있어 소박한 조화를 이룬다. 황 작가가 직접 요구한 방식이라고 한다. 황 작가를 상징하는 디지털 산수화를 감상하고 싶은 관객들을 위해 전시장에는 드로잉 외에 대작 두 점도 마련돼 있다. 가로 270㎝, 세로 180㎝의 홀로그램 필름에 실리콘으로 그린 디지털 산수화 ‘나이 칠십’과 가로 370㎝, 세로 166㎝의 광목천에 먹으로 그린 ‘무제’다. 전시는 오는 27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