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간 이어진 발해의 나라 되찾기 활동, 후발해국·정안국·을야국·대원국 등 세웠지만…

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7) 발해의 복국운동
중국 지린성 돈화시에 있는 강동 24개석. 발해의 주요 교통로 위에 세워진 역참의 건물터로 추정된다.
10세기 들어와 동북아시아는 국가 간 질서재편으로 소용돌이쳤다. 당나라가 907년에 붕괴되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대분열 시대가 시작됐고, 910년대에는 9개국이 난립한 상태였다. 토번(티베트)은 서남 지역의 영토를 대거 잠식했고, 몽골 초원에서는 세계사를 바꿀 ‘몽올’ 부족이 성장했으며, 840년에 멸망한 위구르 한(칸)국의 망명인들 또한 혼란을 일으켰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중이었고, 신흥세력인 후백제와 고려가 긴박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에 몽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거란은 925년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주변국 상대로 적극적 외교관계 모색

그렇다면 위기에 직면한 발해는 어떤 자구책을 강구했을까? 신흥국인 후량과 후당에 몇 번이나 왕자를 파견했다. 신라 등(‘新羅諸國’)에 구원을 요청하는(《거란국지》) 등 타국과 우호관계를 모색했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왕건의 선조인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사냥꾼으로서, 성골(聖骨) 장군으로 불렸는데, 이는 발해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왕건은 발해 유민을 환대했는데, 거란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방문한 호승(胡僧)을 통해 후진(後晉)의 고조에게 “발해는 우리와 혼인했습니다(渤海我婚姻也)”라고 했다.(《자치통감》)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발해 멸망 후

중국 지린성 옌볜시 화룽현 용두산 근처에 있는 발해 문왕의 넷째 딸 정혜공주의 묘에서 발견된 벽화.
그런데 의문이 든다. 야율아보기는 발해의 항복을 받은 직후에 괴뢰국인 ‘동란국(東丹國)’을 세웠다. 유민들의 저항을 무마할 목적이었다. 실제로 즉시 압록주에서 유격기병 7000명이 홀한성을 돕기 위해 왔으나 패배했고, 연해주 일대와 함경도 일대에서 복국(復國)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국력이 남아있었다. 그럼 유민은 어떻게 됐을까? 첫째, 임금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 등 지식인은 항복해서 적의 체제 속에 유리한 조건으로 흡수됐다. 둘째, 승전국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나 변방의 군인으로 살다 죽었다. 979년에 발해 수령인 대난하는 송나라로 귀순했다. 셋째, 현지에 남은 대부분 주민은 신질서에 순응하면서 말갈인이 됐다. 넷째, 일부 기개가 넘치고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들은 독립군처럼 저항하다 희생당하고 일부는 나라를 세웠다.

929년에 대연림은 후발해국을 세워 화북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938년에 정안국이 압록강 하류에서 건국됐는데, 길림성 남부지역과 함경도 일대까지 차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임금인 오현명은 송나라에 “본래 고구려 옛터에 발해의 남은 백성들을 거느려 사방을 지킨 지 여러 해 됐습니다”라는 국서를 보냈다. 말을 수출해서 ‘발해의 병마와 토지가 해(거란의 일족)의 족장보다도 강성합니다’(《宋史》)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985년에 멸망하면서 1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995년에 올야국(兀惹國)이 건국됐으나 금방 멸망했다. 1029년에 대연림이 흥요국을 세워 여진인들이 따랐으며, 요와 전투를 벌이면서 고려와도 교류했으나 결국 다음해 멸망했다. 1116년에는 고영창이 대원국(대발해)을 세웠다. 발해인은 거의 200년 가까이 복국운동을 한 특이한 사람들이다.

200년 가까이 復國운동 펼친 발해인

다섯째, 탈출해서 남의 나라에서 살다가 끝내는 흡수됐다. 유민들은 고려·요·송·돌궐 심지어는 사신 배구처럼 일본까지 갔다. 《발해고》를 쓴 유득공(柳得恭)은 고려로 넘어온 사람들이 약 10여만 명이라고 했다. 실제로 927년부터 1116년까지 들어온 발해 유민은 12만 명 전후로 본다.(임상선, 《새롭게 본 발해유민사》) 왕건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작위를 내렸다. 수만 명을 데리고 귀순한 발해 세자 대광현에겐 발해종사(渤海宗祀)를 받들게 했다. 또 거란의 사신단이 942년에 50필의 낙타를 몰고 왔을 때 교류를 거절하면서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굶겨 죽였다. 심지어 후진과 동맹을 맺고 거란 공격을 시도했다.

한 집단과 구성원이 역사의 기로에서 선택한 것을 두고 후대인이 무책임하게 평가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발해의 왕과 귀족, 권력층인 지식인 등에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물론 백성들이라고 해서 역사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비록 힘이 미약하더라도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민중 면피론’이란 허구가 사라져야 우리 역사에 미래가 있다.

“고려가 끝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라는 책에서 자아가 마비된 조선을 향해서 외친 절규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발해는 거란에 항복한 직후에 연해주 일대와 함경도 일대에서 복국(復國)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국력이 남아 있었다. 929년에 대연림은 후발해국을 세워 화북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938년에 정안국이 압록강 하류에서 건국됐다. 995년에 올야국(兀惹國)이 건국됐으나 금방 멸망했다. 1029년에 흥요국은 요와 전투를 벌이면서 고려와도 교류했으나 결국 다음해 멸망했다. 1116년에는 고영창이 대원국(대발해)을 세웠다. 발해인은 거의 200년 가까이 복국운동을 한 특이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