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이준석은 '전략'이 있다 [좌동욱 국회반장의 현장 돋보기]
입력
수정
당 대표 한달 만에 호된 신고식, 기성 정치 문법 안 따른 대가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최근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지난 12일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첫 여야 대표 회동의 합의내용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소위 ‘이준석 신드롬’을 한달 여 지켜보던 여야 기성 정치인들이 “때가 왔다”며 일제히 매를 꺼내들고 있습니다. 제 1야당 대표로 그렇게 큰 실수를 한 걸까요? 저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혹여나 기성 정치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고 ‘이지메’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친정에선 “코로나19 피해에 대해 선별 지원해야 한다는 보수당의 핵심 철학을 버렸다”는 비판이 거셉니다. “당의 철학까지 맘대로 뒤집는 제왕”(윤희숙 의원) 등의 비난까지 쏟아지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약속을 어기는 정치인은 정치해선 안 된다”(이재명 경기지사)며 날을 세웁니다. 문제가 되는 조항은 재난지원금 관련 내용입니다. 합의안은 “우선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을 충분히 확대하고(①), 만약 재원이 남으면 재난지원금 범위를 전 국민으로 확대하는 것(②)을 검토하는 데 동의했다”는 내용입니다. 정부가 제출한 33조원 규모 추가경정예산안을 증액하는 방안은 전혀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소상공인 피해 지원 확대는 국민의힘이 그동안 줄곳 주장해 온 정책입니다. 국민의힘에서 보면 여야 대표 회동으로 얻은 성과물입니다. 반대로 재원이 남으면 재난지원금을 현행 80%(정부안 기준)에서 전 국민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합의는 송영길 대표의 성과입니다.
“당의 철학 버렸다” 비난하는 野의원, 기본소득 논의 땐 침묵
“재난지원금 확대보다 소상공인 피해 지원 중요” 전략적 판단 곱씹어야
반대를 위한 반대 野 정치인에 국민 실망…실리없는 명분보다 전략 중요
여야 협상의 기본은 주고받기입니다. 이준석은 소상공인 피해 지원 확대를, 송영길은 재난지원금 대상 확대의 성과를 챙긴 셈입니다. 102석의 야당이 ①번 조건을, 172석 여당은 ②번 조건을 주고받았습니다. 국회 심의과정에서 추경예산안의 증액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헌법 57조에 따라 정부 동의를 받아야합니다. 행정부 견제라는 입법부 취지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런 전제를 고려하면 정부가 제출한 33조원의 추경예산 중 ①번 예산을 늘리면 ②번 예산이 자동적으로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합의안에 따르면 여당은 재난지원금 지급대상을 80%에서 100%로 늘리면서 지급 총액은 줄여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됐습니다. 이준석 대표가 ‘칸막이의 문제’라고 비유한 이유입니다. 실제 민주당과 기획재정부는 벌써 추경 총액을 늘리거나 지급대상을 확대하는 문제를 두고 벌써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정권말기 힘빠진 청와대가 이 문제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을 지도 의문입니다.
야당이 이번 회동에서 합의를 하지 못한다면 어땠을까요. 익숙한 풍경을 보게 됩니다. 둘 중 하나의 시나리오입니다. 민주당 주도로 추경안을 통과시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민생 발목을 잡는다는 비난을 의식한 야당이 여당, 정부와 협의해 추경 예산안의 세부내용들을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소상공인이나 전국민 재난지원금도 대개 민주당 주도로 조정됩니다. 야당은 “현금 살포 정치에 강력히 반대했다”라는 명분 뿐입니다.
저 역시 소비 진작을 위한 재난지원금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가 다시 창궐하는 마당에, 중앙은행이 자산 버블을 우려해 금리인상을 염두에 둔 와중에 소비진작을 위해 재정을 풀겠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현실입니다. 정부가 가져온 추경안을 원점으로 돌릴 힘이 없다면 차선의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협상을 하는 것도 야당의 몫입니다. 이에 대해 이준석 대표는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추경 총액을 지금보다 확대하지 않는 선이라면 재난지원금 대상을 80%에서 100%로 늘리는 것보다 소상공인 지원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과반 의석을 민주당이 차지한 여대야소 국면에서 야당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적 판단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런 고민에 대해 “당의 경제 철학을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주장하는 다수의 현역 의원들은 지난해 기본소득을 당의 정강정책 1호로 도입할 당시엔 침묵했습니다. 81세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 면전에서 평소 소신을 숨기던 정치인들이, 36세 이준석 대표에겐 ‘당의 철학’을 운운하며 목소리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당내 대표적인 경제통인 유경준 의원조차 “당내 어른들의‘훈수’는 요즘 말로 ‘꼰대행세’로 비춰질 뿐”이라고 꼬집을 정도입니다.
이참에 야당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당 의원들을 보면 명분에 너무 집착하다 민심을 잃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전략없이 명분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당의 간판 경제통인 윤희숙 의원에게 ‘임대차 3법’의 부작용을 고칠 대안을 물었더니 “법을 폐지하는 외에 답이 없다”고 하더군요. ‘여당이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협상가능한 대안은 없냐’고 물어봐도 “다른 방법이 없다”고 일축합니다 1년 밖에 되지 않은 법을 폐지하겠다고 여당이 순순히 나설까요? 저는 회의적입니다. 진정한 ‘프로’라면 여당 의원도 한번쯤 고민할 수 있는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4월 재보궐 선거에서 압도적인 격차로 당선된 오세훈 서울시장은 당선 후 기자회견에서 “전임 시장의 정책도 큰 문제가 없다면 계속 이어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동안 야당이 강하게 비판해온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작업이나 유치원 무상급식 등도 행정의 연속성 측면에서 이어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야 진영 구분을 따지지 않는 이런 현실 정치인의 모습에 국민들은 박수를 보냅니다. 서울시민들이 나경원, 박영선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오세훈을 뽑아준 이유입니다. 유권자들은 현명합니다. 국회의원 경험이 전무한 30대의 이준석을 당 대표로 뽑아준 시대적 흐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입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