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절터서 높이 8㎝ 고려 금동불·'의곡사' 기와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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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1046년 뜻하는 글자 기와도 나와 경남 함안의 절터에서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형 금동불과 사찰 이름으로 짐작되는 명문(銘文, 금석에 새긴 글자) 기와가 나왔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광려산 기슭에 있는 절터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높이 8㎝인 고려시대 금동불과 '의곡사'(義谷寺), '중희십오년'(重熙十五年) 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을 찾아냈다고 19일 밝혔다.
발굴조사가 이뤄진 강명리 절터는 돌로 여러 단의 기단을 조성한 뒤 건물을 지은 사찰이었으나, 현대에는 공동묘지로 사용돼 절터가 일부 훼손됐다.
조사단은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강명리 절터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해 고려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하며 세력을 이어간 사찰의 자리였음을 확인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유물은 소형 금동불로, 연꽃무늬가 있는 받침대인 연화대좌와 일체를 이룬다.
부식이 진행돼 형태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머리 부분에 솟은 상투 모양 뼈인 육계와 몸에 걸친 옷인 가사, 손가락 모양인 수인(手印), 광배(光背·빛을 형상화한 장식물)를 거는 고리가 확인됐다. 불교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불상 양쪽에 연결 흔적이 있고, 대좌 아래에 길고 뾰족한 부분이 남은 점으로 미뤄 휴대용 법당인 불감(佛龕)에 삼존불 형태로 모신 것 같다"며 "다만 깨진 청동그릇 조각과 함께 삼존불의 중심 불상으로 추정되는 유물만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곡사'와 1046년을 뜻하는 '중희십오년' 글자 기와는 강명리 절터의 위세와 사명을 알려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라며 "'중희십오년' 글자 기와를 제작한 시기에 중창이 크게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의곡사는 당시 문헌에 별다른 기록이 없고, 같은 이름의 사찰이 경남 진주에 현존한다"며 "올해 조사 면적이 250㎡에 불과해 추가로 발굴을 하면 의미 있는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조사는 문화재청이 지원하는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 일환으로 진행됐다. 강명리 절터가 있는 광려산에는 석조 불상과 석탑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연합뉴스
발굴조사가 이뤄진 강명리 절터는 돌로 여러 단의 기단을 조성한 뒤 건물을 지은 사찰이었으나, 현대에는 공동묘지로 사용돼 절터가 일부 훼손됐다.
조사단은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강명리 절터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해 고려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하며 세력을 이어간 사찰의 자리였음을 확인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유물은 소형 금동불로, 연꽃무늬가 있는 받침대인 연화대좌와 일체를 이룬다.
부식이 진행돼 형태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머리 부분에 솟은 상투 모양 뼈인 육계와 몸에 걸친 옷인 가사, 손가락 모양인 수인(手印), 광배(光背·빛을 형상화한 장식물)를 거는 고리가 확인됐다. 불교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불상 양쪽에 연결 흔적이 있고, 대좌 아래에 길고 뾰족한 부분이 남은 점으로 미뤄 휴대용 법당인 불감(佛龕)에 삼존불 형태로 모신 것 같다"며 "다만 깨진 청동그릇 조각과 함께 삼존불의 중심 불상으로 추정되는 유물만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곡사'와 1046년을 뜻하는 '중희십오년' 글자 기와는 강명리 절터의 위세와 사명을 알려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라며 "'중희십오년' 글자 기와를 제작한 시기에 중창이 크게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의곡사는 당시 문헌에 별다른 기록이 없고, 같은 이름의 사찰이 경남 진주에 현존한다"며 "올해 조사 면적이 250㎡에 불과해 추가로 발굴을 하면 의미 있는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조사는 문화재청이 지원하는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 일환으로 진행됐다. 강명리 절터가 있는 광려산에는 석조 불상과 석탑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