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보국' 李회장이 남긴 선물…"가까이서 보니 더 설렌다"

이건희 컬렉션, 국민 곁으로

국립중앙박물관·현대미술관
국보 등 135점 21일부터 전시
20일 서울 사간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언론공개회를 통해 실물이 공개된 김환기의 1950년대 작품 ‘여인들과 항아리’. 백자를 이거나 안은 반라의 여인들, 학과 사슴, 꽃장수의 수레와 새장 등 다채로운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는 가로 5.7m, 세로 2.8m 대작이다.
가지런히 놓인 청동방울 일습(국보 제255호)에서 2500여 년 전 한반도에 울려퍼지던 방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지금의 충청남도 땅에 살던 어느 부족의 족장은 때로는 풍요를, 때로는 전쟁의 승리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제기(祭器)를 흔들었을 테다. 옆에는 순금으로 된 ‘쌍용무늬 둥근고리 칼 손잡이 장식’(보물 제776호)이 놓여 있다. 정교하게 조각된 두 마리 용의 눈에 박힌 유리구슬이 1500년의 세월을 넘어 그윽한 푸른 빛을 뿜어낸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비가 갠 인왕산의 절경이 시야에 펼쳐진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이 20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방대한 컬렉션 중 명품과 걸작을 엄선한 특별전 개막을 하루 앞두고 열린 언론공개회에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국보와 보물 28건을 포함한 45건 77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한국 근대미술 거장 34명의 대표작 58점을 만날 수 있다. 청동기시대 그릇과 철기시대 방울에서부터 삼국시대 불상, 조선백자를 거쳐 근현대 미술 사조를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이 본격적으로 국민과 마주하는 것이다.

고미술품의 세밀한 아름다움

국립중앙박물관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에는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 토기와 청동기, 삼국시대 금동불·토기, 고려시대 전적(典籍)·사경·불교미술품·청자, 조선시대 전적·회화·도자·목가구 등이 시대별로 두루 나와 있다. 이 회장의 컬렉션이 우리 역사의 전 시기와 분야를 아우름을 체감할 수 있는 자리다.

전시에 나온 기증품 중 상당수는 교과서에도 실린 국가지정문화재다. 하지만 실제로 봤을 때의 감동은 사진과 비교를 불허한다.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세밀한 아름다움이 가득해서다. 박물관 관계자는 “기술 혁신과 디자인을 강조한 이 회장의 경영철학과 맞닿은 유물을 엄선했기 때문에 전시 수준이 특히 높다”고 말했다.

삼국시대인 4~5세기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우 장식 그릇 받침’이 대표적이다. 토기 겉에는 각종 동물 모양 장식이 붙어 있는데, 백미는 달려드는 뱀을 피해 막 뛰어오르는 개구리의 모습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지면을 박차고 공중에 떠오르는 개구리의 뒷다리가 생동감을 발한다. 조선시대 관요에서 만든 최고급 백자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새겨진 백자 사발’(국보 제286호)의 흰 빛깔도 그윽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이 밖에도 삼국시대 금동불 일광삼존상(국보 제134호), 고려 사경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국보 제235호),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등 정교한 불교 유물과 조선시대 정선의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등 걸작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청동기시대의 ‘붉은 간토기’와 가야의 ‘배 모양 토기’부터 강물에서 유유히 노를 젓는 뱃사공을 그린 18세기 ‘백자청화산수무늬병’(보물 제1390호)까지 도자기 역사도 망라돼 있다.

컬렉션의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박물관이 마련한 여러 장치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시관 초입의 대형 화면에서는 비온 뒤 인왕산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 작품 ‘인왕산을 거닐다’가 상영된다. 인왕산 호랑이가 엎드린 모습의 범바위부터 정상의 거대한 암벽인 치마바위까지 인왕제색도의 세부 묘사와 실제 풍경을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전시관 안쪽에서는 빛이 바래기 전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이 담긴 적외선과 X선 촬영 사진을 터치스크린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한국 근현대 미술 정립한 국민화가들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에서는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 ‘국민 화가’들을 비롯해 한국 미술의 근간을 구축한 거장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만으로도 근현대 미술 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게 특징이다.전시장 초입에는 백남순이 8폭 병풍에 그린 ‘낙원’, 이상범의 10폭 병풍 그림 ‘무릉도원’ 등 1920~1930년대 작품들이 걸렸다. 서화의 전통이 서양 미술과 만나 융합·변모하는 과정을 비교해 감상할 수 있다. 이어지는 전시에서는 김환기의 ‘산울림 19-II-73#307’,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흰 소’ 등 익숙한 걸작들을 만나게 된다. 미술관 관계자는 “이중섭의 황소 그림과 김환기의 전면점화가 한 점도 없다는 게 부끄러웠는데 이번 기증으로 한이 풀렸다”고 말했다.

전시장 마지막 부분에는 천경자의 ‘노오란 산책길’과 박생광의 ‘무녀’, 이응노의 ‘구성’ 등 1970~1980년대 회화와 김종영의 조각품들이 있다. 다양한 작가가 저마다 고유한 조형세계를 구축하며 한국 미술을 풍요롭게 한 시기다. 김은주 학예연구사는 “이건희 컬렉션 덕분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탁월한 작가들을 재조명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건희 컬렉션 주요 전시 작품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국보 제255호)
금동보살입상(보물 제780호)
쌍용무늬 둥근 고리 칼 손잡이 장식(보물 제776호)
이상범, 무릉도원, 1922, 비단에 채색; 10폭 병풍
천경자, 노오란 산책길, 1983, 종이에 채색, 967x76cm
장욱진, 마을, 1951, 종이에 유채, 25x35cm
장욱진, 나룻배, 1951, 패널에 유채, 137x29cm
장욱진, 공기놀이, 1938, 캔버스에 유채, 65x805cm
이중섭, 흰 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305x415cm
이중섭, 황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65x367cm
이응노, 구성, 1971, 천에 채색, 230x145cm
이응노, 구성, 1971, 천에 채색, 230x145cm
백자 청화 산수무늬 병
붉은 간토기 항아리
일광삼존상
인왕제색도
이대원, 북한산, 1938, 캔버스에 유채, 80x100cm
유영국, 작품, 1974, 캔버스에 유채, 136x1365cm
유영국, 작품, 1972, 캔버스에 유채, 133x133cm
변관식, 금강산 구룡폭(金剛山 九龍瀑), 1960년대, 종이에 수묵채색, 1205x91cm
백남순, 낙원, 1936년경, 캔버스에 유채; 8폭 병풍, 173x372cm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195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박수근, 유동, 195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박생광, 무녀, 1980, 종이에 채색, 136x140cm
김환기, 산울림19-II-73#307, 1973, 캔버스에 유채, 264x213cm
권진규, 자소상,1967, 테라코타, 35×23×20cm
추성부도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
천수관음보살도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