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 이기려면…" 삼성전자에 퍼진 파다한 소문 [박신영의 일렉트로맨]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삼성디스플레이
LCD 사업부 합쳐 별도법인 만든다는 소문 돌아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모두 강력 부인 "사실무근"
업계에선 삼성전자 파운드리 독립 필요성 언급
삼성디스플레이도 중국 저가 공세 밀려 LCD사업 철수 수순
LCD 생산라인 빈자리 활용 방안 고심
삼성전자 파운드리 화성캠퍼스 전경. 한경 DB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 3~4일 간 같은 내용을 묻는 전화를 하루에 수십통씩 받았다. 삼성전자에선 파운드리 사업부를, 삼성디스플레이에선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부문을 떼어내 합친 새로운 법인을 만든다는 소문이 전자업계에 퍼졌기 때문이다.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심지어 영어로 번역된 정보지까지 돌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는 이같은 내용의 질문에 강력하게 "사실 무근"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에선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황당무계한 수준의 상상은 아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부가 더 성장하기 위해선 '삼성'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삼성디스플레이의 LCD 사업이 철수 수순을 밟고 있어 해당 사업장을 파운드리로 활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TSMC 이기려면 '삼성' 브랜드 떼어내야"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전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2위 업체다. 점유율은 17% 가량이다. 1위는 점유율 54%인 대만 TSMC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부문에서 TSMC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TSMC의 독특한 경영 철학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사실 파운드리 시장을 발굴한 업체가 TSMC다. TSMC의 설립자는 모리스 창이다. 모리스 창은 원래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수석 부사장까지 지낸 반도체 전문가였다. "반도체 산업 발전에 기여해달라"는 대만 정부의 요청으로 54세에 귀국한 뒤 만든 기업이 TSMC다. 모리스 창은 당시 생산 시설을 만들 여력이 없는 설계 전문 팹리스 기업이 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파운드리'라는 독특한 사업모델을 구상했다. 이들 팹리스 기업들은 당시 반도체 대기업에 제작을 맡기면 디자인과 설계 기술을 내놓으라는 강요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 TSMC가 등장했다. 모리스 창은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을 고객사에게 강조했다. 전세계 팹리스 기업들은 환호했다. 팹리스 기업들이 기술 유출에 대한 두려움없이 믿고 제품 생산을 맡길 수 있어서였다. 삼성전자는 기술력 면에선 TSMC에 뒤지지 않는다. 미세 공정이 가능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에 대한 대규모 투자로 전세계에서 TSMC에 견줄만한 첨단 반도체 생산력을 가진 곳은 삼성전자 뿐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TSMC와 반대로 고객사들과 경쟁하는 처지다. 노트북부터 스마트폰,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반도체가 들어가는 주요 전자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텔 혹은 애플과 같은 기업의 발주 물량을 받아오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계속해서 파운드리 사업부 독립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며 "기술 유출에 대한 고객사들의 두려움을 없애지 않는 이상 TSMC를 넘어서기 힘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디스플레이 LCD 사업 철수 수순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 전경. 한경DB
삼성디스플레이는 올해 초까지만 LCD 사업 철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저가 공세를 펼치는 중국 업체들로 수익성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여파로 펜트업(보복)소비 트렌드가 생기면서 LCD 수요가 급증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LCD 패널 가격이 오르면서 수익성 문제가 해결된 데다 중국업체들과의 가격협상력을 걱정한 삼성전자 측의 요청으로 LCD 생산라인을 남겨둔 것으로 알려졌다. 최주선 삼성디스플레이 사장도 5월 말 LCD 사업부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회사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내년 말까지 LCD 생산을 지속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삼성디스플레이의 LCD 사업 철수 계획은 일정이 잠시 연기됐을 뿐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이미 2019년 주력 LCD 공장인 충남 탕정 L8 생산 라인 일부를 철수했다. 동시에 사업부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2020년까지만 LCD를 생산한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디스플레이는 철수하기로 한 탕정 생산라인 일부를 LCD 패널 생산에 조금 더 활용하기로 한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삼성디스플레이가 LCD 생산라인의 빈자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주목하고 있다. 천안사업장도 LCD 생산 중단으로 일부 공장 가동이 멈추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지에 대한 회사 내 검토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독립 가능성과 삼성디스플레이의 LCD 사업 철수 얘기가 맞물리면서 두 회사의 사업부간 합병·독립 얘기가 나온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생산라인엔 내진설계 필요

다만 삼성디스플레이 LCD 생산라인이 파운드리로 바뀌려면 몇가지 큰 걸림돌이 있긴 하다. 우선 내진 설계가 필요하다. 반도체 제조공정은 수백단계의 가공작업이 연속적으로 이뤄진다. 어느 한 부분이 멈추면 다른 공정에도 줄줄이 피해가 발생한다. 여러 날 동안 공장 가동이 어려울 정도로 피해가 심각할 땐 전세계 반도체 가격이 요동친다.

올해 초 미국 텍사스 한파, 대만 가뭄 등이 겹치며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이 발생한 것도 이때문이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최대 진도 6을 견딜 수 있게 내진 설계를 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디스플레이의 LCD 공장을 바로 반도체 생산에 활용할 수 없다"며 "내진설계와 반도체 장비 반입까지 고려하면 아예 기존 공장을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설사 삼성전자 내부에서 이같은 사안을 검토한다 해도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긴 어렵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여전히 구속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돌아온 다음에야 대규모 설비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