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잘 쏜 선수가 태극마크"…'공정'이 만든 33년 무패

세계 최강 한국 양궁 비결은…

'원칙의 힘'이 만든 금메달
1988년부터 한번도 金 안놓쳐
나이·경력 안 따지고 공정 선발
양궁협회 "기회의 평등" 고수
사진=뉴스1
‘한국 양궁에는 금수저가 없다’는 말이 있다. 과거 성적, 학벌과 관계없이 수개월간 이어지는 선발전에서 수천 발의 화살을 과녁 가운데에 가장 잘 꽂은 선수가 태극마크를 단다. 국가대표를 포함한 모든 선수가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해 선발전이라는 촘촘한 체를 통해 걸러진다. 고등학생에게 세계 톱랭커들이 덜미를 잡히는 곳이 한국 양궁대표 선발전이다. 장영술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은 “어떤 배경, 어떤 환경에 있는지와 관계없이 오로지 잘 쏜 선수가 선발되는 제도”라고 했다.

기회의 평등 원칙 ‘무적’ 신화 밑거름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고수한 양궁협회의 뚝심은 여자 단체전을 ‘33년 동안 무적’으로 이끈 원동력이 됐다. 25일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결승전에서 ‘9연패’를 달성한 강채영(25) 장민희(22) 안산(20)은 ‘올림픽 루키’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쟁쟁한 메달리스트 언니들을 이긴 실력자이기도 하다. 5년 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전 종목 석권의 중심이었던 장혜진(33)은 2차 선발에서 떨어졌다.전날 한국 선수단에 첫 금메달을 선사한 혼성 경기 출전 선수 선발 과정은 양궁협회의 원칙주의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협회는 장고 끝에 ‘현재 최고 기량을 보여준 선수를 대표로 내세운다’는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혼성 대표 내부 선발전’을 대회 기간 열리는 랭킹라운드로 삼았다. 혼성전에서 2012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오진혁(40), 2016 리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우진(29)이 아니라 고교생 김제덕(17)이 선발된 배경이다.

랭킹라운드에서 680점을 쏴 25년 묵은 올림픽 기록을 갈아치운 안산 역시 세계랭킹 1위를 경험한 강채영을 밀어냈다. 결국 국제대회 혼성 경기 경험이 사실상 전무했던 두 막내를 첫 혼성 경기에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으로 이끌며 ‘원칙의 힘’을 증명했다.

양궁협회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공정성을 더 높이기 위해 선발 제도를 바꾸기도 했다. 2019년 8월 열린 대표 선발전부터 기존 국가대표 선수들도 1차전에 모두 참가하도록 한 것이다. 기존에는 비(非)국가대표 선수들끼리 1·2차 선발전을 거친 뒤 국가대표 선수들과 3차 선발전-평가전을 치러 대표를 뽑았다. 기존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마지막 혜택까지 완벽히 지웠다. 이른바 ‘짬짜미’를 막기 위해 같은 팀 선수끼리 첫 경기에 대결하도록 대진을 짜기도 했다.
지난 24일 일본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양궁 혼성 결승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안산(오른쪽)의 화살이 9점에 꽂혀 우승이 확정되자 김제덕이 포효하고 있다. 이날 경기 내내 ‘파이팅’을 외친 김제덕에 대해 안산은 “제덕이가 ‘파이팅’을 많이 외쳐줘 긴장이 풀렸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선에 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줄 잇는 ‘영재 궁사’

‘기회의 평등’ 원칙은 원활한 세대교체도 촉진하고 있다. 역대 양궁 최연소 금메달리스트인 김제덕이라는 스타도 발굴할 수 있었다. 기보배 KBS 해설위원(런던·리우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 “이런 궁사는 처음 본다”고 말할 정도로 패기 넘치는 김제덕은 벌써 한국 양궁의 ‘슈퍼스타’로 거론된다. 그는 2019년 도쿄올림픽 선발전에서 어깨 부상으로 낙마했다가 올림픽이 1년 미뤄지면서 두 번째 도전 만에 출전하는 행운을 잡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양궁을 시작한 그는 2016년 SBS ‘영재 발굴단’에 ‘양궁 신동’으로 소개됐다. 결국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대형 사고’를 쳤다.

2관왕에 오른 안산도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에서 전 종목 우승(6관왕)을 차지했다. 2017년 광주체고에 진학한 뒤에는 유스세계선수권대회 혼성전 은메달을 시작으로 2019년 세계양궁연맹(WA) 현대양궁월드컵 4차 대회 개인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제덕과 안산은 남은 기간 올림픽 양궁 사상 첫 3관왕(혼성·남녀 개인·남녀 단체)에 도전한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