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애꿎게 재수생된 한국인 유학생

정영효 도쿄 특파원
지난해 일본의 주요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한국인 수험생 상당수는 시험 한 번 못 쳐보고 재수생이 됐다. 일본 정부가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외국인 입국을 제한한 탓에 본고사와 대면 면접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이 주로 지망하는 일본 상위권 대학은 본고사와 대면 면접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 대학에 진학하려는 한국 수험생들은 일찌감치 일본 대입에 ‘올인’한다. 이제 와서 한국 대학으로 진로를 급변경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부 학생의 문제가 아니다.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일본 입국이 막혀 재수생이 된 수험생과 일본 기업에 취업하고도 입사를 포기한 취업준비생이 1만5000여 명에 달한다. 한국의 극심한 입시 경쟁과 취업난을 피해 일본으로 눈을 돌린 학생들이 매년 급증한 결과다.

日 '코로나 쇄국'에 피해 잇따라

일본 정부가 2년째 ‘코로나 쇄국정책’을 이어가면서 올해 고3 수험생 역시 시험 한 번 못 보고 재수생이 될 판이다. 지난해 재수생이 된 수험생들은 삼수생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됐다.

한국인 유학생이 적지 않다 보니 한때 수험생 사이에선 일본 대학이 면접위원을 한국에 파견하거나 면접 방식을 온라인으로 바꾸는 등 배려를 해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고 한다. 정원 외로 뽑는 외국인 유학생은 대학 재정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기대와 달리 한국 유학생의 몫은 오롯이 중국 학생 차지가 됐다. 일본에 체류하면서 유학을 준비 중인 중국인 학생만으로 정원을 채우고도 남았다는 것이다.일본을 직접 경험한 일본 유학생들은 미래에 한국의 소중한 인적 자원이 된다. 지난 14일 한·일 의원연맹 회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김 의원이 특파원 간담회에서 “일본 유학생들이야말로 미래 한·일 관계의 주역”이라고 말한 이유다.

극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제사회에서 일본과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일본 사정에 빠삭한 지일파들은 한 명이라도 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 귀한 싹들이 일본의 입국 금지 조치로 잘려 나가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한국 대학과 기업에 취업하려는 일본 학생들에게 입국과 장기체류 자격을 허가하고 있다. 일본인 지한파들은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는 셈이다.

'한·일 관계 주역' 싹 잘라서야

한국을 잘 아는 일본인은 늘어나는데 일본을 잘 아는 한국인은 줄어드는 현상은 양국 외교가에서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외무성에서 ‘코리안스쿨(한국을 담당하는 지한파 외교관 그룹)’은 출세 코스의 하나로 인기가 있는데 한국 외교부에서 ‘재팬스쿨(일본을 담당하는 지일파 외교관 그룹)’은 승진을 못하는 코스로 외면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교의 기본원칙은 주는 만큼 받는 상호주의다. 일본의 방역지침 일부만 탄력적으로 운영해도 한창때 온갖 유혹을 참아가며 공부한 학생들이 시험 한 번 못 쳐보고 재수생이 되는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바람은 2주간의 격리도 감수할 테니 본고사와 면접 기간만이라도 일본에 입국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와세다대 등 일본의 주요 사립대는 오는 9월부터 수험전형을 시작한다. 시간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무산되면서 이번 정권에서 한·일 관계 개선은 물 건너갔다는 분석이 많다.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 대신 유학생 문제부터 먼저 해결한다면 외교적으로도 의미 있는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