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이 진짜 사용자" 노동위원회 조정 신청 '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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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현대제철, CJ대한통운...이달에만 3건사내협력사 직원 등 하청업체 근로자들이 원청을 상대로 조정을 신청하는 사건이 이달 들어서만 주요 대기업에서 3건이 발생했다. 조정신청은 쟁의행위(파업)를 위한 사전 단계로 '노조법상 사용자'를 대상으로만 할 수 있다. 하청 노조의 잇단 조정신청 이면에는 '쟁의행위 의지'를 보이며 사용자를 압박하는 동시에 노동위원회로부터 원청이 자신들의 노조법상 사용자라는 확인을 받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노조 입장에서 조정 신청은 '일석이조'
전문성 부족한 조정위원 오판 우려도
◆현대차, 현대제철, CJ대한통운…이달 조정신청 '봇물'
통상 조정신청은 사용자에게 교섭을 요구하면서 시작된다. 교섭을 요구했는데 회사가 수 차례 응하지 않아 노동위원회가 조정을 해달라는 의미다. 위원회로부터 조정이 불가능(불성립)하다는 판단을 받으면 조합원 투표를 거쳐 파업이 가능하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난 1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소속된 전국금속노동조합이 현대차를 상대로 신청한 노동쟁의 조정신청에서 조정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적절한 해결방법을 강구할 것을 권고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이는 조정 불성립이 아니라 아예 조정 대상이 아니라는 일종의 각하 판단이다. 사실상 회사의 승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지난 26일에는 현대제철 사내협력업체 근로자들(금속노조 산하 지회)이 현대제철을 상대로 충남지노위에 조정신청을 제기했지만, 늦은 저녁 노조가 신청을 취하했다. 같은 날 중노위에서도 CJ대한통운 대리점 택배기사들이 CJ대한통운을 상대로 조정신청을 제기했다가 취하하는 일이 있었다.
현대차 사건을 보면 금속노조는 "원청 현대차가 하청(협력사) 근로자들에게 업무 지휘권을 행사하며 실질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다"며 "단체교섭 당사자에 해당하므로 노조의 교섭요구에 응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현대차는 "협력사 근로자는 협력사에 교섭요구를 해야 하며 우리는 당사자가 아니다"라며 "교섭요구에 응할 의무가 없다"고 맞섰다. 중노위가 노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판단 근거는 △원청은 하청 근로자와 직접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없고 △원청이 하청근로자들의 근로조건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했다고 볼 수 없으며 △협력사도 실체가 있으므로 원청과 하청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노조, 조정 신청은 '일석이조'
조정 신청의 주된 이유는 표면적으로 파업권 획득이다. 조정대상이라는 판단이 나오면 노조는 쟁의행위, 즉 파업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그런데 쟁의행위는 노조법상 사용자를 상대로 할 수 있다. 조정대상이 나온다는 것은 노동위원회가 '원청이 하청 근로자들의 사용자'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다.
결국 조정신청은 하청 근로자들이 원청을 상대로 '당신이 우리의 사용자'라고 주장하는 여러 수단 중 하나다. 좀 더 직접적인 수단으로는 '불법파견 소송'이 있지만 조정 신청을 하는 이유는 좀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불법파견 소송은 법원에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며 "반면 조정은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결론이 나오고, 문턱이 낮은 위원회에서 혹시 인용이라도 된다면 이슈를 불러일으키기도 좋다"고 설명했다. 현대제철이 26일 충남지노위에서 한창 진행 중이던 조정신청을 도중에 철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정 진행 중 불리한 흐름이 보이자 취하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회사 측을 대리한 김용문 덴톤스리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법논리적으로 원청인 현대제철의 사용자성이 인정되기는 어렵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26일 중노위에서 신청을 취하한 택배노조 사건은 조금 결이 다르다. 얼마전 업계를 흔들었던 CJ대한통운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신청 사건에서 'CJ대한통운이 (하청 격인) 택배노조 근로자들의 노조법상 사용자'라는 판단을 이미 받은 바 있다. 이번 조정 신청은 승기를 잡은 여세를 몰아 '파업권 획득'을 하겠다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CJ대한통운을 대리한 이정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현대차처럼 권고 판정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자 도중에 신청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노조의 전략적인 '치고 빠지기'에 기업들은 분주해졌다. 김 변호사는 "원청의 사용자성 확대가 화두가 되고 중노위가 중심에 서면서 원청을 상대로 한 각종 노동위원회 신청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며 "노동위원회의 판단 결과는 법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노사관계 현장 실무적으로 매우 큰 파급효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다소 전문성이 떨어지는 조정위원회에서 계속 사용자성에 대한 법리적 판단을 하게 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노사관계 전문가는 "아무래도 조정 위원들은 변호사나 법학 전문가로 이뤄진 심판 위원들 보다 법학 전문성이 떨어진다"며 "조정에 최적화된 위원들에게 사용자성 판단이라는 복잡한 법리 판단을 계속 맡기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곽용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