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한국 펜싱 뒤엔…'키다리 아저씨' 있었다

SK텔레콤, 2003년부터 대한펜싱협회장사 맡아
국제대회 국대 전원 보내고 국내 세계대회 유치
드림팀, 올림픽 경기장 재현 등으로 물심양면 지원

선수들, 치열한 훈련과 전략으로 '발펜싱'으로 세계정복
2012 런던대회 이후 세계 강국으로 '우뚝'
사진=연합뉴스
28일 도쿄올림픽에서 금빛 낭보를 울린 한국 남자 사브르팀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 이어 금메달 2연패를 이뤄냈다. 사브르와 함께 에페, 플뢰레 등에서도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이어지면서 한국 펜싱은 3개 대회 연속 올림픽 펜싱장 시상대 꼭대기에 태극기를 올렸다.

유럽이 독식하던 펜싱을 한국이 정복한 바탕에는 '키다리아저씨' SK텔레콤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펜싱환경을 척박했다. 한국 선수들은 국제대회의 절반 정도만 출전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국가대표 중 상위권 일부만 출전했다. 국제대회를 통해 경험을 쌓고 랭킹을 올려, 이를 바탕으로 시드를 배정받는 선수들 입장에서는 국제대회 경험이 곧 실력이 된다.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해낼 수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2003년, SK텔레콤이 대한펜싱협회장사를 맡으면서부터다. 2003년 조정남 SK텔레콤 부회장을 시작으로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신헌철 전 SK에너지 부회장을 거쳐 현재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까지 SK그룹 계열사에서 대한펜싱협회장을 맡고 있다. 2003년 이후 지금까지 SK텔레콤이 지원한 금액은 총 242억2000만원. 지난해에는 도쿄올림픽 준비를 위해 27억원이 후원됐다.

SK텔레콤은 우선 선수들이 국가대표 전원이 모든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수들이 경기 환경에 익숙해지고 다른 나라 선수들과 자주 만나야 대응력과 자신감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아시아선수권, 세계선수권 대회를 한국에 유치하고 국제대회인 SK국제그랑프리대회를 신설했다.

선수들의 몸과 마음도 함께 보듬었다. 런던올림픽때부터 국가대표팀을 지원하는 '드림팀'을 운영했다. 체력트레이너, 의무트레이너, 영상분석팀 등 전문가의 지원과 더불어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박사급 인력이 심리, 체력강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펜싱은 종목 특성상 부상이 잦다. 부상을 예방하고 재활운동을 돕기 위해 기존 3명으로 운영되던 의무 트레이너를 6명으로 늘려 국제대회마다 선수단과 함께 파견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과거에는 큰 규모의 국제대회에만 의무팀이 파견돼 경기 외의 훈련 등에서 입는 부상에는 관리에 한계가 있었지만 지금은 경기 전후 관리가 강화되면서 부상이 많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선수들은 치열한 훈련과 전략·전술 개발로 화답했다. 체격조건에서 압도적 우위를 갖고 있는 유럽선수들을 공략할 해법을 찾아냈다. 바로 '발 펜싱'이다. 키가 큰 대신 하체가 약해 손동작이 중심인 유럽 선수들을 빠른 스텝으로 파고 들었다. 상대 선수가 한 스텝 뛸 때 한국 선수들은 두세 스텝을 뛰었다. SK텔레콤과 펜싱협회의 지원, 여기에 선수들의 피땀이 더해지면서 축적된 역량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터져나왔다. 한국은 펜싱에서만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따내며 이탈리아에 이어 종합 2위를 기록했다.

런던올림픽을 계기로 세계 무대에서 한국 펜싱의 위상도 달라졌다. 이전까지 유럽 강국들이 독주하면서 한국을 주목하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런던올림픽 이후 한국은 가장 중요한 분석 및 견제 대상이 됐다. 펜싱협회 관계자는 "이전에는 해외 전지훈련에서도 한국팀이 해당국가에 합동훈련을 요청하는 입장이지만 런던올림픽 이후에는 다른 나라에서 한국으로 전지훈련을 오고 합동훈련을 요청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말했다.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을 비롯해 세계적 강국인 스페인, 독일 국가대표도 한국을 찾아와 한국팀과 호흡을 맞췄다.
2020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펜싱 국가대표들이 SK텔레콤이 충북 진천선수촌에 마련한 펜싱경기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이 경기장은 올림픽 경기장과 똑같은 환경을 재현해 실전에서 선수들이 심리적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도왔다. SK텔레콤 제공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는 진천 선수촌에 실제 결승 경기장과 똑같은 조건의 피스트(펜싱경기장)를 설치했다. 선수들이 실전같은 훈련을 통해 올림픽 무대에서 심리적 안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이같은 지원과 선수들의 피땀이 합쳐지면서 한국은 다시 한번 펜싱 강국의 자리를 지켜냈다. 상대보다 한발 더 빠르게 움직이는 한국 사브르팀은 28일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강호들을 잇따라 침몰시키며 금메달을 따냈다. 27일 여자 에페 단체전에서도 상대의 허점을 공략하는 날랜 몸놀림으로 신체적 열세를 극복하고 귀한 은메달을 따냈다. 한국 펜싱이 써내려가는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자 에페팀은 30일 단체전, 여자 사브르팀은 31일 단체전에서 메달에 도전한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