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그해 여름 - 아버지,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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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그해 여름 - 아버지
김용수대지가 뒤끓는 대낮
대청마루 뒤안길은
여름 바람이 몰래 지나가는 길
뒷문 열어제치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솔솔이 바람
반질반질한 대청마루 바닥에
목침을 베고 누워
딴청을 부리시던 아버지매미소리 감상하며
소르르 여름을 즐기시던 우리 아버지
[태헌의 한역]
當年夏日(당년하일)
- 父親(부친)
大地沸騰屬夏午(대지비등속하오)
廳堂後匿夏風途(청당후닉하풍도)
後門任誰一大開(후문임수일대개)
如坼湺水風直趨(여탁보수풍직추)
當年廳堂裏(당년청당리)
油光木廊上(유광목랑상)
父親依枕臥(부친의침와)
說他世事忘(설타세사망)
快賞蟬聲淸(쾌상선성청)
慢嗜夏日旺(만기하일왕)[주석]
* 當年(당년) : 그해. / 夏日(하일) : 여름, 여름날. / 父親(부친) : 아버지.
* 大地(대지) : 대지, 땅. / 沸騰(비등) : 들끓다, 뒤끓다. / 屬夏午(속하오) : 바로 여름 한낮. ‘夏’는 역자가 한역 시구의 의미의 완결성을 위하여 임의로 보탠 글자이다.
廳堂(청당) : 대청(大廳). 역자는 이 시에서 대청마루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 後(후) : ~뒤, ~뒤에. 역자가 원시의 “뒤안길”을 대신하여 사용한 말이다. / 匿(익) : 숨다, 숨어 있다. / 夏風途(하풍도) : ‘여름 바람<의> 길’이라는 의미로 역자가 조어(造語)한 한자어이다.
後門(후문) : 후문, 뒷문. / 任誰(임수) : 누구든지, 아무든지. 역자가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임의로 보탠 글자이다. / 一大開(일대개) : 한번 활짝 열다. 원시의 “열어제치면”을 역자가 한역한 표현이다.
如(여) : ~과 같다. / 坼湺水(탁보수) : 봇물을 터뜨리다. / 風直趨(풍직추) : 바람이 곧바로 내닫다.
裏(리) : ~의 안, ~의 속.
油光(유광) : 반질반질(하다). / 木廊(목랑) : 마루. 역자는 이 시에서 나무로 된 마루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 上(상) : ~의 위, ~의 위에.
父親(부친) : 부친, 아버지. / 依枕臥(의침와) : 목침에 의지하여 눕다, 목침을 베고 눕다.
說他(설타) : 다른 것을 말하다, 딴전을 피우다. / 世事忘(세사망) : 세상일을 잊다. 역자가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임의로 보탠 표현이다.
快(쾌) : 마음껏, 기꺼이.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탠 글자이다. / 賞(상) : ~을 감상하다. / 蟬聲淸(선성청) : 매미소리가 맑다. 어떤 동사의 목적어가 되면 “맑은 매미소리”라는 뜻이 된다.
慢(만) : 느긋이, 마음대로. 역자가 “소르르”의 대응어로 골라본 글자이다. / 嗜(기) : ~을 즐기다. / 夏日旺(하일왕) : 여름이 한창이다. 어떤 동사의 목적어가 되면 “한창인 여름”이라는 뜻이 된다.
[한역의 직역]
그해 여름
- 아버지
대지가 뒤끓는, 바로 여름 한낮
대청 뒤에 숨어 있는 여름 바람 길
대청 뒷문을 누구든 한번 활짝 열면
봇물 터지듯 곧바로 내닫는 바람
그해 대청 안
반질반질한 마루 위에
아버지는 목침을 베고 누워
딴청 부리시며 세상일 잊고
맑은 매미소리 마음껏 감상하며
한창인 여름을 소르르 즐기셨지[한역 노트]
엊그제 입추 지나고 오늘이 말복이니 이제 올 더위도 얼추 다한 듯하지만, 그리하여 바람 끝이 벌써 달라진 듯도 하지만, 아직은 한동안 낮이면 가마솥처럼 뜨거울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할 것이다. 농작물들이 본격적으로 성숙해야 할 담금질의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례해 농부들의 노고의 시간 역시 거를 수 없는 징검돌로 놓여있다. 가을의 풍요 속에는 이렇게 담금질과 노고의 시간이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미루어 짐작해서 알 수 있는 것들도 있고, 직접 겪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시인이 얘기한 “솔솔이 바람”은, 역자가 보기에는 후자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대청마루에서 제대로 된 “솔솔이 바람”을 느끼자면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일단 대청마루 앞뒤가 모두 최소한 어느 정도는 트여 있어야 하며, 정남향의 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정남향집을 선호했던 것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청마루는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깃든 공간이기도 하였다.
오전의 들일을 마치고 돌아와 등목을 끝낸 후에 대청마루에서 점심상을 마주하였을 시 속의 “아버지”에게는 들일의 피로와 점심 식사 후의 포만감과 곁들인 탁주의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무더운 여름날을 무색하게 만드는 “솔솔이 바람”까지 얹어졌으니 “아버지”는 목침에 머리가 닿자마자 이내 곯아떨어지셨을 터다. 그런데 이 낮잠을 누군가가 깨웠다는 사실과 이 낮잠의 품질(?)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 바로 “딴청”이라는 말이다. 이 “딴청”은, “아버지”가 완전한 수면 상태가 아니라 언제든지 깰 수 있는 가수면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관건(關鍵)이 되는 핵심어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딴청”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이 시는 시의 내용보다 더 많은 얘기를 들려줄 수가 없다. 다소 애가 타 “아버지”의 낮잠을 깨워야만 하는 가족 누군가-당연히 어머니겠지만-의 심사와, 꿀보다 달콤한 낮잠을 좀 더 즐기고픈 “아버지”의 심사를 이 말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뜨거운 여름이라도 농가에는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다. 누군들 더운 여름날에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원 없이 자고 싶지 않았으랴만, 그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을 농촌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잡풀이 금세 쫓아 들어와 1주일만 지나도 호랑이가 새끼를 쳐도 모를 정도로 자라버린다. 그러기에 가족 성원 누군가가 길어지고 있는 "아버지"의 단잠을 깨웠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더 단잠을 즐기고픈 “아버지”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가 않다. “조금만 더 자고”와 같은 직설적인 말은 가장으로서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이 되기 쉽다. 그렇다고 잠결에 아스라이 들려오는 그 ‘채근’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다소 궁색하기는 해도 그나마 딴청이 가장 잘 어울릴 것으로 여기셨으리라. “내년에 들 밭둑에 매화나 몇 그루 심어볼까?”와 같은 말이 바로 “아버지”의 딴청이었을 것이다.
농촌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낸 독자라면 ‘이 시는 바로 우리 집 얘기네.’라는 혼잣말을 하게 되었을 듯하다. 이 “아버지”의 ‘딴청 사건’이 과연 몇 시쯤에 일어났을까를 따져보는 것은, 땅을 하늘로 여기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흙을 지키는 사람들의 노고를 만분지일이나마 이해하는 일이 될 듯하여, 도회지 출신의 독자 여러분들에게 숙제로 남겨둔다.
역자는 4연 10행으로 된 원시를 칠언 4구와 오언 6구로 구성된 고시로 한역하였다. 칠언구와 오언구 모두 짝수 구에 압운하였지만 운(韻)은 달리 하였다. 그리하여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途(도)’·‘趨(추)’, ‘上(상)’·‘忘(망)’·‘旺(왕)’이 된다.
2021. 8. 10.<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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