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 산업찾기] 단돈 1만 원에 1500개 효소 돌연변이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칩’ 개발

효소는 우리 몸이 제 기능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백질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몸에는 수천 가지의 효소가 존재하죠. 효소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신호전달에 문제가 발생해 암과 같은 심각한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종류의 효소가 있고, 다양한 종류의 돌연변이가 있다 보니 각각의 돌연변이가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 번에 1000개 이상의 효소 돌연변이를 확인할 수 있는 칩이 개발됐습니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7월 23일 자에는 손톱만 한 작은 칩이 소개됐습니다. 총면적이 7㎠에 불과한 이 칩은 놀랍게도 한 번에 1568개 효소 돌연변이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칩의 가격은 10달러, 한화로 약 1만1400원입니다.박테리아 효소의 526개 돌연변이 한 번에 확인하는 데 성공
칩이 개발되기 이전에 효소의 돌연변이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효소를 구성하고 있는 수백 가지의 아미노산을 하나씩 바꾼 뒤 각각의 돌연변이가 효소의 활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운이 나쁠 경우 이 작업은 수년이 걸리곤 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개발한 미세유체 칩 ‘HT-MEK(High-Throughput Microfluidic Enzyme Kinetics)’은 1568개의 작은 공간(웰·well)과 이 공간에 시약을 전달해주는 미세유체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각각의 웰에 서로 다른 돌연변이 효소 DNA를 넣어준 뒤, 효소의 발현에 관여하는 물질이 포함된 시약을 흘려주면 각각의 돌연변이 기능을 알 수 있습니다.

연구진은 칩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PafA’라는 박테리아 효소를 이용했습니다. PafA는 526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뤄져 있는데요, 각각의 아미노산을 다른 아미노산으로 변경한 DNA 서열을 설계해 ‘PafA 돌연변이 라이브러리’를 제작했습니다. 연구진은 시약에 PafA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빛을 방출하는 발광물질을 포함시켰습니다. 빛의 양이 많을수록 PafA가 정상적인 활동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비활성 부위의 역할 확인, 약물 타깃 확장 가능
이번 연구는 ‘한 번에’ 1000개 이상의 돌연변이 효소를 확인할 수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효소를 포함한 단백질 돌연변이 연구는 ‘활성부위(active site)’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대부분 중요한 돌연변이는 모두 활성부위 근처에서 일어났고, 비활성부위까지 모두 돌연변이 기능을 확인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던 탓입니다.

연구진은 “PafA를 이용해 실험해본 결과, 우리의 편견은 잘못됐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비활성 부위에도 중요한 돌연변이가 다수 존재했다”고 말했습니다. 가령 단백질의 접힘 구조를 변화시키거나 다른 단백질과 결합하는 식입니다. 실제 연구진은 PafA에서 중요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161개의 비활성 부위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발견은 신약개발업계에는 굉장한 희소식입니다. 그동안 활성부위의 돌연변이가 구조적으로 정상 단백질과 너무 비슷해 ‘개발할 수 없는(undruggable)’ 타깃으로 분류됐던 단백질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암젠의 ‘루마크라스(성분명 소토라십)’의 타깃인 RAS 단백질이 대표적입니다.

세포분열에 관여하는 신호전달체계에는 RAS 와 같은 인산화효소(키나아제)가 중요한 ‘트리거’입니다. 인산화효소에 돌연변이가 생겨 과활성되는 경우 비정상적으로 세포가 분열하게 되고 결국 암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김대권 보로노이 대표는 “우리 몸에는 600여 개의 키나아제가 있지만, 단백질의 구조를 알 수 없어 실제 약물로 개발되는 타깃은 EGFR, ALK, RET 등 10%도 채 안 된다”며 “약물로 개발되고 있는 타깃도 돌연변이와 정상 단백질의 활성 부위가 매우 유사해 선택성이 약물 개발의 성공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부위들의 활성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물 타깃의 범위를 매우 확장해준 연구라고 보인다”며 “PafA 이외에 실제 사람의 효소에서도 동일한 작용을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는 의견을 보였습니다.

이번 논문의 교신 저자이자 오랫동안 효소 연구를 해온 저명한 생물학자인 다니엘 헤르슐라 스탠퍼드대 교수는 “손쉽게 약물 개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빠르고 값싸게 분자 단위에서 환자의 질병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글 최지원 기자

*이 기사는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8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