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진의 바이오 뷰] 바이오업계의 새로운 전략, 리포지셔닝

글 김선진 플랫바이오 대표
비아그라는 당초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됐지만 협심증 치료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대신 부작용에 집중,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발기부전 치료제가 됐다.
리포지셔닝(repositioning), 혹은 리퍼포징(repurposing)이라는 신약개발의 떠오르는 분야가 있다. 무엇인가 재배치, 재시도한다는 의미인 것을 보면 재도전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재도전을 한다. 원하는 학교나 전공학과에 못 들어가면, 때로 졸업 후에도 가고 싶은 학교나 전공에 재도전한다. 직장도 예외는 아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들어간 직장도 아니다 싶어 뛰쳐나오거나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기기도 한다.즉 재도전이란 실패했거나 시행착오, 혹은 더 좋은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임상시험에서 실패해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그렇다면 신약개발에서 재도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발생할까. 첫째는 임상시험에서 실패한 경우이며 그 이유가 물질의 효능이 기대치에 못 미치거나 독성이 제어가 불가능한 경우, 혹은 두 가지에 다 해당되는 경우다.

해결 방법은 단순하다(쉽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미다). 포기하거나 물질을 개선하는 것이다. 물질의 한계가 발견됐을 때는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다른 경우는 물질 자체의 생물학적 유효성에는 이상이 없으나 사용법이 잘못됐을 때다. 적응증을 잘못 선택했거나 용량, 투여 스케줄, 병용 약물의 결정이 맞지 않거나 최적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추가 전임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적응증을 찾고 용법의 최적화를 통해서 임상시험에 재도전할 수 있다.

물질 자체는 똘똘하기 때문에 그 과정은 복잡하고 난이도가 높을 수 있지만 여러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고 물질 개선도 시도할 수 있어서 전자에 비해 재도전해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비유를 해보면 막상 들어가보니 내가 기대하던 학창 생활이 아니고 전공도 별로 재미가 없을 때는 다른 학교나 같은 학교의 다른 과에 다시 시험을 보거나 전과를 시도해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직장이라면 다른 업무를 배정 해달라고 요구하거나 부서를 옮길 수도 있는 것이다. 둘 다 당장에 다닐 학교나 직장이 없는 것이 아니니 선택의 여지가 많은 것이 닮은 꼴이다.

적응증 확대·용법 변경도 하나의 리포지셔닝 방법
둘째는 임상시험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내고 있는 물질, 혹은 최종 승인을 받은 물질을 다른 질환으로 적응증을 확대하거나 용법 변경을 시도하는 경우다.

질환의 병리생리 기전이 유사하거나 연관된 다른 질환의 경우나 같은 질환을 대상으로 기존에 밝혀진 것과 다른 기전으로, 혹은 같은 기전에 대해 다른 개념의 접근 방법을 통한 개발을 시도하는 것이다.실제로 현재 시도되고 있는 신약개발을 위한 리포지셔닝의 많은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시 비슷한 비유를 들어, 내가 전공한 것을 더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학부 전공과 유사하거나 혹은 다른 분야로 대 학원을 진학하는 경우에 해당되겠다. 내 업무와 유사하거나 다른 업무로 확대하거나 융합하여 더 나은 업무효율이나 좋은 결과를 도출하려는 시도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리포지셔닝 전략,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 결코 적지 않아
이미 성공적인 개발과정에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연관된 기전을 확인하고 새로운 적응증이나 용법으로 개발하는 것이니 자칫하면 아주 쉽게 접근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거나 심지어는 거저먹기로 인식돼 많은 연구자가 몰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다. 초기의 개발 비용을 제외하고는 전임상 시험의 규모와 내용, 쏟아 부어야 할 피와 땀의 노력이 신물질의 개발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임상 개발과 시험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도 비슷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새로운 적응증이나 용법에 필요한 용량이 증가되는 경우라면 전임상 독성시험과 독성을 테스트하는 임상 1상도 면제받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 더 큰 규모로 수행해야 하는 수도 있다.

죽을 고생을 해서 학교나 학과를 옮겼는데 기대하던 것과는 다르게 여전히 적응하고 이겨내야 할 것이 많아 ‘왜 옮겼나’ 허탈해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부서를, 심지어는 직장을 옮겼는데 호랑이 굴에서 나와 사자 굴로 들어간 것 같은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일 어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권리확보를 위한 전략도 고려해야
물질 특허가 살아 있는 경우, 권리 확보를 위해 지불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고 특허가 만료된 경우에는 용도 특허 이외에는 권리를 주장할 방법이 없다.

특히 유사 물질이 용도 특허를 회피해 들어올 경우 뚜렷한 방어 기법이 없다. 마치 의사나 전문의같이 업무영역을 지켜주는 자격증이나 면허가 없는 경우에는 애써 개발한 업무시스템이나 표준 운영 절차(SOP)의 독창성이나 권리를 주장하고 지키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과학자로서 보람 있는 일
그럼에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한 해 동안 승인하는 신약의 3분의 1 정도가 리포지셔닝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을 보면 상당히 인기 있고 영향력이 큰 신약 개발기법이다.

과거에 발명된 물질들 중 올바른 사용법을 몰라서 억울하게 사장(死藏)된 물질들을 캐내는 것은 과학자로서 보람 있는 일이다.

마치 보석 같은 재능이 발견되지 못해 벤치에 머무르고 있는 후보선수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포지션을 맡기고 작전을 구사해 팀을 승리로 이끄는 감독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신약개발이나 우리가 사회에서 시도하는 리포지셔닝은 결코 누구나 할 수 있고 첫 도전에 비해 쉽거나 무임승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올바른 접근이 아니면 성공도 보장되지 않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고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하지만 실패나 시행착오의 반복이 두려워서 도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재도전! 그 목표가 무엇이건 가치 있고 해볼 만한 우리 인생의 멋진 이벤트다.
<저자 소개>

김선진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한 비뇨기과 전문의다. 일본국립암연구소의 초빙연구원을 거쳐 미국 MD앤더슨 암센터 교수로 근무했다. 한미약품 부사장을 역임하고 플랫바이오를 설립했다.
중개연구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미국암학회(AACR) 학술상을 수상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8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