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사이공…최후 탈출 수단은 왜 헬기였을까 [여기는 논설실]

사진=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 점령된 지난 15일, 미국 대사관으로 대형 헬리콥터 CH-47 치누크가 줄줄이 날아들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이 헬기를 타고 황급히 탈출했다. 미국 정부는 당초 4200명의 직원을 17일까지 대피시킬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급박해지자 긴급 헬기 탈출로 작전을 바꿨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베트남전 때의 ‘사이공 탈출’과 관련한 질문에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것을 보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지 5주 만에 이런 상황이 그대로 벌어졌다. 46년 전인 1975년 4월 29~30일 베트남의 사이공(현 호찌민)이 함락될 때에도 헬기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당시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사이공의 공군기지까지 떨어지자 비행기 탈출을 포기하고 헬기로 남중국해에 있던 미군 항공모함까지 직원들을 실어날랐다.

‘프리퀀트 윈드’(잦은 바람)로 불린 이 작전으로 미국인 1300여 명과 현지인 5500여 명 등 7000명이 수도 함락 직전 가까스로 떠났지만 400여 명은 미처 탈출하지 못했다.

사방 포위된 고립지의 유일 수단

카불이나 사이공 모두 최후의 탈출 수단은 헬기였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 사방이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대사관이 섬처럼 고립됐기 때문이다. 육로로 빠져나갈 길이 없기에 마지막 수단은 헬기밖에 없었다. 활주로가 필요한 전투기는 이럴 때 무용지물이다. 수직이착륙 기능을 갖춘 최신 기종이라 해도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이마저도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다. 사이공의 경우 바다와 가까워 해양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확보돼 있었지만, 사방이 산악지대에 가로막힌 카불에서는 그야말로 헬기밖에 쓸 카드가 없었다.

이번 카불 수송 작전에서는 그나마 거리가 짧았다. 다행히 카불 국제공항은 미군 통제 아래 있었다. 여기에 투입된 CH-47은 큰 박스형 동체에 33~55명의 완전무장 병력을 태울 수 있는 대형 수송용 헬기다.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은 더 많이 태울 수 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이보다 수용 인원이 적은 UH-60 블랙호크 헬기까지 동원했다.

CH-47 헬기는 AH-64 아파치, UH-60 블랙호크와 함께 미 육군의 3대 헬기로 불린다. 연료를 많이 싣고 항속거리도 길어서 중장비 수송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아프간전에서는 치누크 1대가 블랙 호크 5대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능력을 발휘했다. 베트남전에서도 특유의 탑재능력으로 험지에 각종 물자와 야포까지 수송했다. 우리나라 역시 실전 배치해 운용하고 있다.

사이공선 24명 정원에 36명까지 태워

사이공 탈출 작전에는 CH53 치누크 헬기가 주로 쓰였다. 수용 인원은 50여 명이었으나 훨씬 많은 사람을 실어날랐다. 이보다 작은 CH46 헬기의 정원은 24명이었지만 여기에도 36명이 탔다. 베트남인의 체구가 작은 점을 감안해도 위험 수위를 넘는 ‘도박’이었다. 조종사들은 “대사관 지붕에서 기체가 무사히 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훗날 회고했다.
이들은 가능한 한 최대 인원을 태우고 해안에서 32㎞ 떨어진 미국 해군 함대를 향해 남중국 해상으로 날아갔다. 40척의 함정에 분산 탑재된 헬기들의 왕복 운항은 사이공의 대통령궁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대사관에 있던 최후의 해병 11명을 구출한 것은 30일 아침 7시50분쯤이었다. 치누크 헬기가 무장 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사관 옥상을 떠난 지 약 1시간 후 북베트남군의 중국제 탱크가 대통령궁 문을 부수며 들이닥쳤다.

“역사의 교훈 잊지 말라” 마지막 전문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사이공 지부장인 토머스 폴가는 헬기에 타기 직전 워싱턴DC에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 그는 ‘사이공 지부에서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라는 전문에서 ‘길고 힘든 싸움이었지만, 우리는 졌다’고 썼다.

그러면서 ‘우리는 수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고도 정책이 인색하고 어정쩡했는데, 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베트남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교훈을 얻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미국 커뮤니티 사이트인 레딧 등에는 그의 전문을 인용하며 미국이 역사의 교훈을 잊었다고 비판하는 글이 폭주했다. 대규모 군대를 보내고 막대한 경제 원조를 했지만 질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사이공을 넘어 카불에서도 재연됐기 때문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