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 듯, 쇼룸인 듯…모호한 설계가 전시제품 빛나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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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공간 - 김찬중 더 시스템 랩 대표서울 갤러리아백화점 이스트(EAST) 건너편에 있는 청담동의 한 골목. 명품관과 의류 매장이 즐비한 가운데 정체불명의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커다란 통유리창 안에 인상적인 곡선을 지닌 나무 계단이 존재하며, 너머에는 따뜻해 보이는 카페를 둔 공간이다.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청담쇼룸
건물 용도 숨겨 방문객 흥미 자극
천장·벽면 곳곳 나무 소재 입혀
딱딱한 가전제품 돋보이게 연출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이곳은 LG전자의 프리미엄 쇼룸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청담쇼룸이다. 지난 1월 개점한 뒤 유행에 민감한 여성 소비자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은 곳이다.
전시장 같지 않은 전시장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청담쇼룸을 만든 건 ‘THE SYSTEM LAB(더 시스템 랩)’의 김찬중 대표(사진)다. ‘상업건물 건축의 대가’로 불리는 인물이다.처음 LG전자로부터 의뢰를 받았을 때 김 대표는 가장 먼저 ‘전시장 같지 않은 전시장’을 떠올렸다. 그는 “오래전부터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계를 선호했다”며 “레스토랑인지 쇼룸인지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LG전자 제품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콘셉트 구체화에 나섰다. 딱딱해 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좋은 촉감을 지녔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촉감을 살린 소재를 중점적으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나무 냄새 물씬 나는 인테리어’였다.반년의 시공을 거쳐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청담쇼룸이 탄생했다. 김 대표의 의도대로 계단과 천장, 벽면 곳곳에 나무 소재를 적용한 쇼룸이다. 덕분에 눈이 편안하고, 만졌을 때의 느낌도 좋다. 김 대표는 “딱딱한 가전제품과 콘트라스트(대비)를 이루며 제품을 효과적으로 빛나게 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쇼룸은 총 6개 층으로 구성돼 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다. 입구가 있는 지상 1층은 통째로 브런치 카페다. 건물에 대한 정보를 거의 내비치지 않아 이곳이 단지 브런치 카페인 줄 알고 찾은 방문객도 많다. 김 대표는 “용도를 숨겨 흥미를 자극하는 전략”이라고 전했다.
건물의 진짜 용도는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계단을 타고 오르내려야 드러난다. 섬세한 결을 지닌 3차원 곡면 계단은 김 대표가 이곳을 설계하며 가장 신경 쓴 요소다. 공간의 정체성과도 연결돼 있다. 계단이 내포한 자연친화적이며 따뜻한 이미지는 곧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청담쇼룸 전체의 이미지다.건물의 지하 1층과 지상 2층에는 키친관이 있다. 냉장고, 오븐, 전기레인지 등의 주방가전을 전시한 곳이다. 3층은 이탈리아 ‘보피’ 등의 명품 가구와 LG전자의 다양한 생활가전을 함께 만날 수 있는 리빙관이며, 4층과 5층에는 아틀리에와 VIP라운지를 각각 뒀다. 계단은 전부 안락한 느낌을 주는 원목으로 제작했다.
벽과 천장에는 나무로 만든 여러 포인트가 존재한다. 이 중 수십 개의 결을 지닌 나무 천장은 소리를 잡아줘 공간의 울림을 낮추는 실용성까지 갖췄다. 김 대표는 “은밀하게 기능을 담은 요소 배치를 좋아한다”고 강조했다.
“흰색은 중립적이며 자유로운 색”
김 대표가 만든 상업건물 중에는 꾸준하게 건축업계에서 회자되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2014년 설계한 한남동 오피스 빌딩이다. 자유자재로 변형한 곡선이 포인트인 흰색 건물은 단숨에 한남동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이 건물이 유명해지며 김 대표를 찾는 기업이 급증했다. 그는 “기업의 정체성을 유지하되 일탈의 느낌을 가미한 특유의 설계방식을 기업들이 선호하는 것 같다”고 했다.지난해 ‘월드 럭셔리 호텔 어워즈’에서 ‘럭셔리 빌라 리조트’ 부문을 수상한 울릉도의 ‘힐링 스테이 코스모스 리조트’는 김 대표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바람에 휩쓸린 듯한 외관의 대형 건물은 호텔이라기보다 하나의 커다란 오브제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울릉도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건축물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위 건축물을 비롯해 KEB하나은행 ‘플레이스원’, 폴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 등 김 대표의 유명 작업물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흰색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의 건축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상상력과 직결돼 있다. 그는 “건물에 핑크색을 입히면 사람들은 그걸 ‘핑크 건물’로 규정한 뒤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며 “중립적이며 자유로운 흰색을 애용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받은 건축상만 20여 개에 달하는 김 대표이지만 지금도 1년에 두 번씩 일반주택을 짓는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항상 처음 같은 마음가짐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건축물을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