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병도 중대재해…"직업성 질병 범위 지나치게 넓어"

중대재해법 수정·보완 마지막 기회
시행령 입법예고 23일 종료
경총·상의 등 경영계 마지막 호소

냉방병·급성중독도 질병에 포함
두통 등 주관적 증상으로 판단
"너무 광범위…자의적 해석 우려"
안전체계 구축 의무는 불명확
'충실하게' 등 모호한 규정 수두룩
"차라리 정부 인증제도 만들어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내년 1월 27일)이 약 5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법안 발의 약 6개월 만인 지난 1월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도 “중대재해를 줄이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사업주가 책임져야 할 범위가 너무 넓고 처벌 수위가 너무 강해 경영 의욕을 꺾는다”는 경제계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안 시행 전 ‘독소조항’을 손볼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끝나가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만들기 전 의견을 수렴하는 입법예고 기간은 23일로 끝난다. 경영계에서는 시행령에 모호하고 불분명한 조항이 많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시행을 미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위 먹어도’ 사업주 형사처벌 가능

22일 경제계에 따르면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주요 경제단체들은 조만간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의 문제점을 정리한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할 계획이다. 경제계는 특히 사업주에게 부과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의무 내용이 불분명하고, 중대재해로 규정한 질병 목록이 지나치게 광범위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르면 ‘직업성 질병’에 걸린 근로자가 한 사업장에서 1년 이내 3명 이상 발생하면 사업주를 형사처벌할 수 있다. 시행령 입법예고를 통해 직업성 질병의 목록을 발표했지만 오히려 논란을 키웠다. 경미한 질병이 다수 포함돼 사업주가 처벌받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지적이다.열사병이 대표적이다. 열사병은 옥외작업이 많은 대기업 건설현장 등에서 수시로 발생한다. 대부분 1~2일 정도 휴식 후 회복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급성 중독도 마찬가지다. 급성 중독은 질병 이름이 아니어서 증상과 범위가 모호하다. 일부 급성 중독의 경우 두통이나 현기증, 구역질, 두근거림 등 근로자의 주관적인 증상만으로도 질병 발생으로 간주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행령에서 직업성 질병으로 명시한 중추신경계 장해, 자율신경계 장해, 위장관계 질병 등도 증상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사업주가 이들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1년 이내 3명’이라는 규정도 논란이다. 이미 다른 사업장에서 유해 요인에 노출된 근로자가 직장을 옮긴 이후 질병에 걸리더라도 새 사업장의 사업주가 부당하게 형사처벌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경영계에서는 질병 진단일이나 발생일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업무상 재해와 마찬가지로 사업장의 사고와 질병 사이에 명확한 인과관계가 증명된 경우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벌 법규임에도 모호한 규정 많아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사업주에게 부과하는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의무’ 내용이 불분명하다는 의견도 많다. 시행령은 사업주가 안전보건인력이 업무를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충실하게’라는 표현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 법안에 쓰인 사례는 거의 없다. 경총 등이 “차라리 정부가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을 사전에 평가하고 인증해주는 제도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이유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형벌 법규인 점을 감안하면 다른 법안보다 더욱 명확한 표현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일각에서는 위헌법률심판이 제기될 것이라는 전망도 한다. 실제 이 법이 적용돼 처벌받는 기업이 나오면 헌법재판소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규정이 명확하지 않으면 법 집행기관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거나 수사권을 남용할 우려가 있다. 정부 기관의 특성상 노동계나 여론의 압박으로부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일단 ‘잡아 넣고’ 볼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형벌 책임을 질 수 있는 기업의 경영책임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지적은 법 제정 직후부터 나왔다. 시행령안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이시원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지난 18일 열린 정부 토론회에서 “안타깝지만 현재 법률상 마땅한 해결책은 없다”며 “고용노동부가 가이드라인을 내놓더라도 누가 책임자인지는 법원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예상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