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세계문학전집…그래도 발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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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통권 200권 돌파세계문학전집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지나간 시대의 한물간 모습을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권, 한 권 전집의 리스트를 늘려가는 작업이 우직하게 이어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세계문학 고전이라 부르기 주저했을 작품까지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국내 세번째…12년 만의 기록
초역·절판된 책·무명 작가 작품 등
다양한 '희귀작' 발굴해 선보여
독서 인구·전집 인기 하락에
출간 열기 식어…'신작 가뭄'
"고전문학, 고정 독자층 많아
출판사도 출간 포기 않을 것"
최근 출판사 문학동네가 펴내는 세계문학전집이 통권 200권을 돌파했다. 12년 만의 기록이다.
후발주자의 저력…12년 만에 200권
문학동네는 최근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대표작 《마담 보바리》와 프랑스 자연주의 거장 에밀 졸라의 《패주》를 출간했다. 각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통권 200권째와 201권째 책이다. 문학동네 관계자는 “플로베르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대표작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0권째 책으로 출간했다”고 설명했다.문학동네는 2009년 12월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첫 권으로 내놓으며 세계문학전집 시장에 뛰어들었다. 한국문학에선 강자였지만 세계문학 분야에선 후발주자였다. 이미 1990년 문예출판사, 1998년 민음사, 2001년 문학과지성사가 세계문학전집을 펴내고 있었다. 세계문학전집 붐이 일며 펭귄클래식(2008년), 을유문화사(2008년), 열린책들(2009년), 시공사(2010년) 등이 앞다퉈 뛰어들 때였다.
문학동네가 경쟁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컸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현재 문학동네는 민음사, 열린책들과 더불어 세계문학전집 시장 ‘3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문학전집 200권을 넘긴 출판사는 민음사(2009년 1월)와 열린책들(2012년 2월)에 이어 문학동네가 세 번째다. 김경은 문학동네 해외2팀 부장은 “초역 비율이 높고, 전집에 들어갈 작가와 작품을 꼼꼼하게 선정한 점도 200권 돌파에 12년이 걸린 이유”라고 말했다.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1권 중 국내 최초 번역이거나 다른 출판사 책이 절판돼 현재 문학동네를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 책이 115권으로 절반을 넘는다. 다른 출판사들의 세계문학전집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제인 오스틴,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 비중이 큰 반면 문학동네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의 작품이 많다. ‘묻혀 있는 거장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소개하자’는 취지다. 유명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최고작으로 꼽히지만, 번역이 까다로워 아무도 손을 대지 않던 《창백한 불꽃》도 문학동네를 통해 국내에 소개됐다.
열기 꺾이며 잇달아 신간 출간 멈춰
국내에 세계문학전집이 소개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일본에서 1913년 이탈리아 극작가 단눈치오의 《죽음의 승리》 등 8편 9권의 첫 전집이 나온 이후 ‘다이쇼 명저문고’ ‘근대 서양문학총서’ 등이 쏟아지며 교양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광복 후 일본어 중역이긴 하지만 1959년 국내 최초로 을유문화사가 100권짜리 ‘을유세계문학전집’을 내놓으며 전집의 명맥을 이었다.2008~2010년 무렵엔 여러 출판사가 앞다퉈 시장에 뛰어들며 ‘제2차 세계문학전집 붐’이 일었다. 대학 입학 시험에서 논술 전형이 강조되면서 ‘고전 읽기’ 열풍이 분 덕분이었다.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에 속한 책을 누적 1500만 부 넘게 팔았고, 전체 매출의 30% 이상이 세계문학전집에서 나오기도 했다.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다소 열기가 꺾인 상태다. 현대문학의 에오스 클래식은 2014년 2월을 마지막으로 신간을 내놓지 않고 있다.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2018년 7월), 문예 세계문학선(2019년 4월), 펭귄클래식(2019년 12월)도 신간 출간이 멈췄다. 계속해서 신간을 내는 곳은 민음사, 문학과지성사(대산 세계문학총서), 을유문화사, 문학동네, 열린책들, 창비 등 6곳으로 줄었다. 출판업계 관계자는 “세계문학전집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며 “짧고 쉬운 글에 익숙해진 젊은 독자층을 끌어들이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특성상 세계문학전집 시장이 침체에 빠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문학전집은 세계문학의 정수만 모아놨기 때문에 독자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시장”이라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