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 엑소더스] ① 닫히는 아프간 탈출구…'구명선 타자' 장사진

탈레반, 미국에 8월 31일 '레드 라인'으로 규정…돌변 예상
파키스탄·이란 등 주변국 난민 유입 난색…국경 차단 장벽
31일로 못 박힌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등 철수시한이 다가옴에 따라 즉시 떠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카불공항)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26일 외신과 SNS에 따르면 카불공항은 이달 15일 탈레반이 20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은 뒤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수도 카불의 상당수 시민은 지난 20년간 미국 등 외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부역자'로 낙인찍혀 보복당할 수 있기에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수천 명이 활주로에 달려나와 문이 열린 비행기에 밀고 들어갔고, 수십 명이 질서 유지를 위해 발포한 미군 총에 맞거나 깔려 죽거나, 탈수와 탈진으로 목숨을 잃었다.이륙하는 수송기 바퀴 부위 등에 매달렸다가 공중에서 추락사한 이들도 있다.
탈레반은 처음에는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며 방관하는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검문을 강화하고 공항으로 향하는 이들의 트집을 잡거나 폭행했다.

미국은 자국민과 현지 조력자들에게 "카불공항까지 자력으로 도착하라"고 공지했다가, 탈레반의 행패로 많은 이들의 발이 묶이자 헬기와 특수부대를 카불에 투입했다.카불 시내에서 헬기·장갑차를 타고 공항까지 이동한 이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우리 정부도 아프간에서 우리 활동을 지원한 현지인 직원과 가족 427명을 당초 군 수송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집결 당일 36명이 탈레반의 방해, 제3국행 결정 등으로 카불공항에 도착하지 않았다.
현재 카불공항 내부는 미군과 국제동맹군, 이전 아프간 정부군으로 이뤄진 현지인 보안요원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무장 탈레반 대원들은 공항 밖에 나름의 질서 유지 활동 중이며, 미군 등 외국군과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수 시한인 8월 31일을 '레드라인'으로 규정했기에 이 날짜가 지나면 무섭게 돌변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24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스스로 정한 시한인 이달 말일까지 철군을 완료하라"며 공항 주변에 모여있는 아프간인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촉구했다.

그는 "공항으로 가는 길이 차단됐다.

아프간인은 그 길로 공항에 갈 수 없고 외국인만 공항에 가는 것이 허용된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탈레반이 철수시한을 못 박았고, 이슬람국가(IS) 등 다른 테러 조직이 존재감 과시를 위해 카불공항을 공격할 우려가 크기에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 철군과 대피 작전을 31일 종료하기로 했다.

탈레반의 위협에도 카불공항 철책 밖에는 수송 대상자가 아닌 아프간인들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몰려들었다.
이달 14일부터 미국이 6만명 이상, 영국이 13일부터 8천500명 이상을 카불공항에서 탈출시켰고, 독일, 이탈리아, 터키 등 유럽 국가부터 우리나라까지 수천∼수십명씩 비행기에 태웠다.

내달 1일 카불공항이 닫히면, 수많은 외국인과 현지인 조력자들의 발이 묶일 것으로 예상된다.

탈레반 지도부가 일반 사면령을 발표하고 "보복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미 지방 경찰청장을 기관총으로 처형하고, 미군에 협력했던 아프간인 통역사의 가족에게 사형판결을 전하는 통지문을 보내기도 했다.

아프간 주변국의 육로 탈주로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아프간은 이란, 파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중국의 신장(新疆) 위구르 지구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육로를 이용해 파키스탄, 이란 등으로 탈출하는 방법이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았지만, 탈레반이 농촌·시외지역부터 장악해 도시로 진군했고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해 주요 길목을 통제하고 있다.

무역상이나 여행허가증을 가진 이들이 아니면 인접국으로 넘어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엔난민기구(UNHCR) 대변인은 BBC 방송에 "대부분의 아프간인이 정상적인 경로로 나라를 떠날 수 없게 됐다"며 "현재 위험에 처한 아프간인들의 뚜렷한 탈출구가 없다"고 말했다.
주변국들은 이미 넘치는 난민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파키스탄 당국은 최근 북부 토르캄과 남서부 차만 등 아프간과 연결되는 주요 검문소의 경계와 신원 확인 절차를 크게 강화했다.

아프간과 2천670㎞ 길이의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은 국경 90% 이상에 철제 펜스를 설치했고, 나머지도 올해 말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중으로 구성된 이 펜스는 4m 높이로 윤형 철조망과 감시카메라 등이 설치됐다.

민간인이 뚫고 지나가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아프간과 900㎞ 길이의 국경을 접한 이란도 접경지역 경비를 강화하고, 시스탄-바-발루치스탄주는 난민이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철조망을 설치했다.

터키는 이란에서 아프간 난민이 못 넘어오게 콘크리트 장벽을 갖춘 상태.
결국 카불공항이 닫히면, 탈출을 꿈꾸던 아프간인들의 실낱같은 희망도 꺾이는 상황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