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하게 오린 한지로 표현한 '무속의 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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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작가 양혜규 '황홀망' 展정교하게 오린 한지들이 모여 도깨비와 귀신의 형상을 이룬다. 서늘하지만 공포나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종이를 접은 뒤 잘랐을 때 나오는 특유의 대칭 무늬가 구성하는 전통 문양, 흰색 위주의 절제된 색채와 여백의 미 등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덕분이다. 세계적인 설치작가 양혜규(49)가 무속인들이 망자의 영혼과 접촉하기 위해 쓰던 종이 무구(巫具)를 모티브로 제작한 작품 ‘장파 충전 넋전-황홀망恍惚網 #5’(사진)다.
국제갤러리서 내달 12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한지를 콜라주해 만든 양 작가의 신작 12점을 소개하는 ‘황홀망恍惚網’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충남 태안반도에서는 굿을 할 때 까수기 혹은 설위설경(設位設經)이라고 불리는 종이 무구를 만들어 쓴다. 까수기는 한지를 여러 번 접고 오려내 만드는데, 굿을 하는 도중 망자의 영혼이나 신령을 부르는 등 이승과 저승 간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짚풀공예와 방울 등 다양한 재료를 통해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탐구해온 작가는 물질과 의식을 연결하는 까수기의 의미에 주목했다. 그는 한국민속극박물관과 샤머니즘박물관, 태안문화원 등에서 무속 전문가들을 만나 까수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뒤 이를 현대미술 작품으로 재구성했다. 양 작가는 “종이 공예를 통해 영혼과 정신, 삶의 방식 등을 표현하는 풍습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멕시코와 인도 등에도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며 “하찮은 종이에 정신을 불어넣으면 삶을 상징하는 물질이 된다는 데 흥미를 느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한지와 모눈종이 등으로 만든 평면 작품들을 내놨다. 망자의 영혼을 상징하는 ‘넋전’, 신령을 상징하는 ‘고비전’ 등을 다양하게 변주한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까수기 특유의 토속적인 형상과 경건한 분위기가 살아있으면서도 절묘한 단순화를 통해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게 특징이다. 굿을 하는 법사들이 쓰는 종이 고깔, 잡귀를 차단하거나 가두는 철망 등 추상적인 문양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한 작품들도 전시장에 걸렸다.
양 작가는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국립미술학교인 슈테델슐레 유학을 마친 뒤 설치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009년에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됐고, 2018년에는 아시아 여성 최초로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에게 주는 세계적 권위의 독일 ‘볼프강 한 상’을 받아 화제를 모았다. 현재 모교인 슈테델슐레에서 정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전시는 9월 1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