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물빛 갯벌 금가루 태양…내맘島 고요海

유네스코 자연유산 서천갯벌

허리를 굽혀야 보이는 생명 낙원
'매바위공원'엔 경운기로 사람 날라
유부도엔 100여종 철새 날갯짓
해질 무렵 풍경, 꿈엔들 잊힐리야
어느 시인은 서해에서 사람들은 겸허해진다고 했습니다. 꽃 한 송이 피워 올리지 못하는 갯벌에 엎드려 무릎을 꺾고 고개를 수그립니다. 자연이 주는 것들을 공으로 얻으려면 최소한 허리를 구부리라는 것이겠지요. 갯벌에는 수없이 많은 생명이 공존합니다. 바지락 같은 조개류부터 낙지까지 서해안의 먹거리들은 열심히 허리를 굽힌 사람들이 뻘밭에서 굵은 땀방울을 갯벌에 바치고 건져 올린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바다를 보면 눈부신 태양이 금가루를 뿌리며 분분히 사라집니다. 뒷모습에 찍히는 먹물 같은 어둠. 다시 바다는 고요해집니다. 갯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정입니다.

날것 그대로의 아름다움 담고 있는 서천 갯벌

최근 충남 서천에서 전북 고창, 전남 신안·보성·순천까지 모두 다섯 개 지방자치단체에 걸친 갯벌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고창과 신안, 보성, 순천의 갯벌이야 이미 이름값도 높고 여행지로 각광받지만 굳이 서천의 갯벌로 떠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다.갯벌이 가족들의 체험여행 1번지로 인기가 높지만 과거에도 갯벌에 대한 인식이 요즘처럼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개발과 국토 확장이라는 이유로 대규모 매립과 간척이 이뤄졌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갯벌의 소중한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서천 사람들은 매립과 개발이냐, 생태와 보전이냐의 갈림길에서 서천 갯벌을 보전하면서 생태와 관광으로 지역 발전을 추진하자는 제3의 길을 택했다. 서천 갯벌이 질박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서천 사람들의 지혜로운 결단 덕분이었다.
기벌포 전망대
서천 갯벌은 날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분칠하지 않은 순정한 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서천 갯벌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은 기벌포 해전 전망대다. 장항 송림 뒤에 세운 전망대는 높이 15m, 길이 250m의 스카이워크다. 해변에서 보는 바다와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스케일부터 다르다. 꽉 막힌 일상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데 탁 트인 풍경만 한 것도 없다.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보이고 바다 건너 군산 땅도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가 있는 기벌포는 사실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백제 명장 성충은 “만일 외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다고 하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신라군이 한반도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당나라 명장 설인귀의 부대를 격파한 곳이기도 하다. 치열한 전투가 오갔던 곳이지만 전망대에서는 갯벌이 더 잘 보인다. 달랑게들이 광활한 갯벌에 빚어놓은 동글동글한 모래가 길게 줄을 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갯벌의 음영이 짙어진다.

경운기를 끌고 바다로 들어가는 진기한 풍경

서천 갯벌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는 서천 갯벌 중간쯤에 있는 죽산리의 매바위공원이다. 사실 매바위공원은 인근 주민들조차 잘 모르는 곳이다. 관리도 잘 돼 있지 않아서 그 흔한 팻말조차 제대로 놓여 있지 않다. 공원에 들어서면 매를 닮은 갯바위가 있는데 이 때문에 매바위공원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바다가 쭉 지평선 너머로 말려 들어가면 거짓말처럼 광활한 갯벌이 드러난다. 바닷길까지 족히 20~30분은 걸어 들어가야 바닷물과 닿을 정도로 까마득한 갯벌이다. 썰물 시간이 해지는 시간과 맞물리면 사진작가들이 그토록 탐내는 갯벌의 공연이 시작된다. 갯벌은 처음에는 붉은빛으로 물들다가 금박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이기 시작한다.

매바위공원 앞 죽산리 갯벌에는 경운기가 수시로 드나든다. 죽산리 어민들은 썰물 때면 갯벌이 드러나 배를 띄울 수 없으니 경운기에 배를 싣고 갯벌 끝까지 가서 바다에 띄운다. 이렇게 배를 띄우고 이즈음에는 새우를 잡는다. 돌아올 때도 경운기를 끌고 가서 얕은 바다까지 온 배를 싣고 나온다. 해질 무렵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와온해변
갯벌 체험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면 비인면의 선도리마을이나 서면의 월하성마을을 찾는 것이 좋다. 선도리마을에선 바닷길이 열리면 쌍도까지 걸어갈 수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 쌍도는 밀물 때 하나의 섬으로 보이지만 썰물 때는 두 개의 섬이 된다.

장항읍 송림리의 작은 섬인 유부도도 서천에서 꼭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희귀 조류에게 서식지를 제공하는 유부도 갯벌에는 100여 종의 철새가 날아든다. 저 멀리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새들이다. 유부도는 정기 배편도 없어 찾기 힘들지만 갯벌에서 알락꼬리마도요, 큰뒷부리도요, 백로 등이 어울려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 그림 같은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서천=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