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中운명 바꾼 '쑹씨 세자매'의 엇갈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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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링, 칭링, 메이링파란만장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쑹아이링(宋靄齡), 쑹칭링(宋慶齡), 쑹메이링(宋美齡) 등 이른바 ‘쑹씨 세 자매’의 삶 말이다. 중국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쑨원과 결혼한 칭링, 총통 장제스를 배필로 맞이한 메이링, 중화민국의 재정을 총괄했던 거부 쿵샹시와 연을 맺은 아이링을 두고 흔히 “한 명은 나라를, 한 명은 권력을, 한 명은 돈을 사랑했다”고 입방아에 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걸었던 길은 손쉽게 선택한 탄탄대로가 아니라 짙은 안개 속에서 쉼 없이 장애물과 마주쳐야만 했던 역사의 험로였다.
장융 지음 / 이옥지 옮김
까치글방 / 488쪽│2만3000원
《아이링, 칭링, 메이링》은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중국 대륙과 대만, 일본, 미국은 물론 모스크바와 베를린 등 전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진 세 자매의 남다른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책이다. ‘현대판 공주님들’의 동화와도 같은 인생을 다루지만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린 인간들이 남긴 처절한 기록이기도 하다.쑹씨 세 자매는 평생 엄청난 부와 특권을 거머쥐고 온갖 영광을 누렸다. 중국 역사를 뒤흔든 인물들과 백년가약을 맺었지만 숨 돌릴 틈 없이 혁명과 전쟁, 정치적 암투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절망하고 갈라서며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여인의 삶은 운명의 남자를 만나면서 바뀌었다. ‘마담 쑨얏센(쑨원)’ ‘장제스 부인’이라는 타이틀은 단순한 후광에만 머물지 않고, 화수분과 같은 권력의 근원이 됐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결혼은 결코 ‘뒤웅박 팔자’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주체적 선택의 결과이기도 했다. 쑹씨 자매는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역사의 파고와 대면했다.20세기 초 중국인, 그것도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유학(모두 웨슬리안대 졸업)을 경험했던 이들 여인에게 가장 먼저 다가섰고,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남자는 쑨원이었다. 1911년 청조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이 혁명가는 흠결 없는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현대 중국인들에게 각인돼 있다. 하지만 그들이 현실에서 마주한 쑨원은 결코 고귀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주저 없이 ‘혁명과 여자’를 꼽았던 쑨원은 공인으로선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외세에 국익을 팔아먹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사인으로선 부끄럼 없이 육체적 쾌락을 탐한 난봉꾼이었다. 그는 영어 통·번역 조수로 만난 아이링에게 추파를 던졌고, 이어 조강지처와 자식을 버린 채 딸 나이뻘인 칭링과 ‘도둑 결혼’을 했다.
쑨원과 칭링의 관계는 ‘사랑’에서 시작해 ‘거래’로 마무리됐다. 쑨원은 상하이에서 군벌 천중밍과 대립하던 과정에서 칭링을 미끼로 이용해 전투의 구실로 삼았고,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쑨원에 대한 인간적 신뢰를 잃은 칭링은 이후 ‘쑨원 부인’의 지위를 중국 내에서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쑨원 사후 이를 앞세워 소련과 독일에서 호화 망명 생활을 이어나갔고, 공산화한 중국에서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문화대혁명의 광풍도 비껴갔다.반면 열성적 반공주의자였던 아이링과 메이링은 과감하게 공산주의자를 때려잡은 장제스에게 눈을 돌리며 칭링과 대척점에 섰다. 쑨원 가문의 후광과 명문 ‘쑹 패밀리’의 재력과 영향력이 필요했던 장제스 역시 처와 이혼하고 첩들과의 관계를 정리한 뒤 메이링과 새로 부부가 됐다.
그리고 “수치도 없고, 도의도 없고, 게으르고, 산송장과 같은” 중국인을 ‘개조’해야 한다는 데 장제스 부부는 의기투합했다. 메이링은 중일전쟁 때는 국민에게 모범을 보이고 군의 사기를 북돋는 데 앞장섰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능숙한 영어를 무기 삼아 미국에서 대규모 원조를 끌어냈고, 카이로회담에선 루스벨트, 처칠의 실질적인 파트너 역할을 했다. 대륙이 공산화된 직후, 모두가 풍전등화 처지의 대만을 빠져나갈 때 귀국해 전의를 불태웠던 이도 메이링이었다.
책은 유려한 문장과 생동감 넘치는 서술로 세 자매를 비롯해 쑨원과 장제스, 마오쩌둥 등의 삶을 교차로 보여주며 이들의 엇갈린 운명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동양사학 전공자의 충실한 번역도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다만 문맥상 공사(公使)로 번역해야 할 ‘minister’를 기계적으로 장관(129쪽)으로 옮긴 것과 같은 소소한 실수가 없지는 않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