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로 진영에 충성하고 뜨고 보자는 정치판 [여기는 논설실]
입력
수정
GSGG·똥별 등 갈등·증오 증폭시켜정치인은 말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인의 직업은 말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유권자에게 말을 조리 있게, 설득력 있게 하지 못하면 낙선하기 십상이다. 또 상대 후보, 상대당과 맞서 싸우다 보니 거친 말들이 오가기 일쑤인 게 정치판이다. 정치인들이 험한 말들을 내뱉는 것은 언변과 논리가 약해 감정조절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심리학자의 분석도 있다.
상대를 타협이 아닌 타도 대상으로 여겨
유튜브·SNS 등 ‘노이즈 마케팅’ 횡행
‘한국 정치는 스프링 없는 마차 같다’ 조롱받아
재치 있는 답변으로 부드럽게 상대 제압한
링컨·처칠·레이건식 ‘유머정치’
한국 정치판에선 언제 볼 수 있을까
한국 정치판에서 막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르륵…”(1998년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등신 외교”(2003년 이상배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 노무현 정부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노가리”(2004년 한나라당 의원들, 노무현 대통령 비판하며), “쥐박이”(2009년 천정배 민주당 의원,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그년”(2012년 이종걸 민주당 최고위원,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지칭) 등이 이어졌다. 2019년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라고 규정하자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도둑놈들한테 국회를 맡길 수 있겠나”라고 반박했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사람을 이르는 ‘귀태(鬼胎)’라고 해 파문을 일으켰다.
근래엔 “똘마니들을 규합해 장관을 성토”(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광화문 집회 주동자들은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동네 양아치들을 상대하며 배웠는지 낯짝이 철판”(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도 있다.
김승원 민주당 의원이 ‘막말 목록’을 하나 추가했다. 김 의원은 그가 주도한 언론중재법 처리가 미뤄지자 페이스북에 박병석 국회의장을 향해 “박병석~~정말 감사합니다. 역사에 남을 겁니다. GSGG”라고 썼다. GSGG는 누가 보더라도 ‘개XX’의 영문이니셜이다. 당내에서도 비난이 일자 김 의원은 “정부는 국민의 일반의지에 서브(봉사)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발뺌을 했다. ‘일반의지(general will)’를 ‘general G’로 쓴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김 의원은 결국 박 의장을 찾아가 사과했다. 문재인 대통령 복심이라는 윤건영 민주당 의원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주자 캠프에 현 정부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군 장성들이 합류하자 공개 방송에서 “별값이 X값이 됐다”고 조롱했다. 전역해 민간인이 된 사람의 정치적 선택의 자유에 대해 배신자 취급을 한 것이다.
정치인이 증오와 독기를 품고 상대를 공격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타협이 아닌 타도 대상, 적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진영논리에 충성, 지지층 결집 목적도 있다. 극단적 발언으로 주목도를 높여보려는 의도도 있다. 과거 막말은 주로 기자회견장, 회의 석상에서 이뤄진데 비해 요즘은 유튜브·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전달할 수 있는 수단도 다양해졌다. 당 지도부, 중진 의원이 아닌 초선 의원들도 아무때나 의견을 표출 할 수 있는 ‘판’이 깔리면서 ‘막말 온상’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극단적인 대결 문화는 갈등과 증오를 증폭시켜 타협의 여지를 막아버린다. 한국 정치판의 고질병이다. 온갖 험한 말들이 횡행하니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논쟁은 발 붙이기 어렵다. 상대를 일방적으로 굴복시키려고만 할 뿐 설득의 기술도, 품위도, 촌철살인의 재치도 기대하기 힘들고 ‘노이즈 마케팅’만 횡행한다. 이런 한국 정치의 풍토를 두고 외신에선 “‘스프링 없는 마차’와 같다”고 혹평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애이브러햄 링컨과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유머 정치’는 다시 한 번 새길만 하다. 수 많은 사례 중 하나씩만 소개해 본다. 링컨은 정적 스티븐 더글러스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고 비판하자 “만일 내가 또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면 이 자리에 이렇게 못생긴 얼굴을 들고 나왔겠나”라고 맞받아쳐 상대방이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했다.
레이건은 한 기자가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되받아친 것도 유명하다. 처칠은 한때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다. 여성 의원 낸시 에스터는 이 점을 문제 삼아 처칠에게 “당신이 만일 내 남편이라면 당신의 커피 잔에 독을 넣고 말겠다”고 했다. 처칠은 “만일 당신이 내 아내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커피를 마셔 버리겠다”고 답했다. 공격한 에스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도 널리 알려져 있다. 임기 마지막 해 백악관 출입기자단과의 만찬에서 “공화당 일각에서 도널드 트럼프(대선 후보)에 대해 외교정책 경험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트럼프는 미스 스웨덴, 미스 아르헨티나 등 숱한 세계적 지도자를 만났다”라고 했다. 이어 “내년에는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서게 될 것인데 그녀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재치있게 트럼프를 공격하면서 같은 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원한 것이다. 예로 든 유머들은 절제의 미는 찾기 힘들고 살벌한 전투적 용어로 가득 찬 우리 정치권 풍토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촌철살인’의 재치는 상대의 말문을 막아 ‘무장해제’시키는 막강한 ‘소프트 파워’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이런 멋진 ‘유머 정치’로 상대를 소리없이 제압하는 장면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막말’만이 문제가 아니다. 여당 강성지지층은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진영 논리에 어긋나는 정치인에겐 ‘좌표’를 찍어 살벌한 문자 폭탄을 퍼붓는다. 반대의 경우 집단으로 공감 댓글을 보낸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 원로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옛말이 생각난 것”이라고 망언을 한 정철승 변호사는 “하루 사이에 (소셜미디어)팔로어만 300명 이상 늘었다”고 자랑질 할 정도다. 대선주자들을 포함한 여권은 강성지지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이들의 눈치나 보고 있다. 이러고도 민주주의를 입에 담을 수 있나.
홍영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