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우의 Fin토크] '금융 낙하산'의 자격

임현우 금융부 기자
2018년 청와대 춘추관에서 조국 당시 민정수석(왼쪽)과 황현선 행정관이 대화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 4월 금융부에 오고 나서 밥을 먹은 금융권 취재원이 몇 명쯤 될까. 가늠이 잘 안 된다. 다만 가장 난감했던 식사 자리가 언제냐고 물으면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어느 금융공공기관 상임이사 A씨와의 만남이다. 우리나라 금융 안정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의 임원인데, 그는 여당 계파구도 얘기만 한 보따리 풀어놨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온 A씨는 자신이 몸담은 기관의 현안에는 특별한 말이 없었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자리는 다른 민주당 사람이 채웠다.

가장 흥미로웠던 기억 중 하나는 신용길 전 생명보험협회장과의 만남이다. 교보생명과 KB생명에서 20년 넘게 일한 그는 외환위기 당시 생보사들의 긴박했던 순간부터 새 국제회계기준(IFRS) 채택을 둘러싼 뒷이야기까지 파노라마처럼 읊어줬다. 생보사의 연간 보험금 지급건수가 890만 건인데 94.5%는 3일, 98.5%는 10일 안에 처리되고 0.08%인 7000여 건만 민원으로 남는다는 등의 수치를 종이도 보지 않고 쏟아냈다. “보험업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보험사들도 잘못된 영업 관행은 뿌리뽑아야 한다”는 쓴소리도 했다. 업계에 정통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클래스 차이’는 밥 한 끼만 먹어봐도 느낄 수 있다.

靑행정관이 재점화한 '낙하산 논란'

금융권 곳곳에 포진한 낙하산들이 요새 심기가 편치 않을 것 같다. 20조원 규모의 한국판 뉴딜 펀드를 굴리는 한국성장금융 본부장에 투자 자격증 하나 없는 황현선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낙점되면서 현 정부의 ‘금융 낙하산 흑역사’가 모조리 재조명받고 있어서다. 사실 금융은 강력한 규제산업이라는 이유로 이런 관행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왔다. 그럼에도 낙하산 논란이 또 불거진 것은 “해도 너무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도를 넘은 탓일 터다.

두둑한 억대 연봉이 보장되는 금융권은 낙하산계의 블루오션으로 떠올랐다. 주요 금융협회장은 지난해를 기점으로 다시 정피아·관피아가 주류가 됐다. 여러 협회장 하마평에 잇따라 오르내리던 전직 국회의원은 그게 불발되자 민간 교육기관인 보험연수원장으로 갔다. 급이 안 맞아 보였지만 연간 3억원 안팎의 보수를 받는 ‘알짜 자리’라는 게 뒤늦게 알려졌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주택금융공사 등의 감사직도 여당 인사들이 착착 꿰찼다. 정계 복귀 기회가 오면 언제든 사표를 던지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금융당국 출신 낙하산도 여전하다. 2015년 이후 117개 금융회사·공공기관으로 간 전직 경제관료는 207명이다. 공공기관 45명, 은행 25명, 보험사 66명, 증권사 45명, 협회 6명 등으로 업종도 다양하다. 최근 5년 동안 금융감독원 퇴직 후 공직자윤리위원회 심의를 거쳐 재취업한 4급 이상 직원은 총 79명, 이 중 금융회사로 간 사람이 54명이었다.

前官에 기대려는 금융사도 문제 있다

낙하산 논란을 취재하면서 놀랐던 점은 금융권 사람들도 이런 사람들이 꽂히는 걸 내심 원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19년 내놓은 ‘금융당국 출신 인사의 금융회사 재취업에 따른 경제적 효과’ 보고서에서 짐작할 수 있다. 금감원 출신 인사가 금융사 임원으로 재취업하면 3개월 뒤 금융사가 제재받을 확률이 16.4% 줄었다. 이 보고서가 나오자 금감원은 “신뢰할 수 없는 부적절한 분석”이라는 보도자료를 내 반박했다.

금융권이 정치인·관료 출신에 기대하는 것은 국회·당국과의 연결고리 역할일 것이다. 취임할 때는 낙하산이었지만 민감한 현안을 척척 풀어내 좋은 평가를 받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현직에서 금융권의 목줄을 잡고 슈퍼 갑질을 하다가, 민간인으로 신분이 바뀌면 자기들끼리 자리를 챙겨주는 구태가 반복되고 있다”(금융소비자연맹)는 시민단체 비판이 틀린 것 같지 않다.

P2P 대출 업체들의 모임인 온라인투자연계금융협회는 전 금감원 국장을 초대 회장으로 맞았다. 암호화폐거래소들의 단체인 블록체인협회는 이른바 ‘실세’로 불려온 전 금감원 부원장을 수장으로 택했다. 금융당국 고위 인사를 영입했다고 홍보에 열을 올리는 암호화폐 개발사도 나오고 있다. 혁신을 외치는 핀테크업계조차 금융권의 이상한 전통을 계승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