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당나라의 서역 정벌 영웅, 고선지 장군…고구려 출신 병사들과 파미르 고원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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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산책지칠 대로 지친, 수 백 명의 당나라 군인들이 3일 동안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의 탄구령(坦駒嶺) 정상에 도달했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현재의 키르키트인 소발률국(小勃律國)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66)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
당나라를 압박한 토번과 사라센 제국
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는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당태종은 토번의 임금인 송챈감포(松贊岡保)에게 딸인 문성공주를 왕비로 보낼 정도였다. 울면서 멀고도 먼 티베트까지 시집을 간 그녀의 애달픈 사연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토번은 이 무렵에는 더욱 막강해져 당나라의 장안을 위협하고, 서북쪽으로 진출해 파미르 고원의 산악 지대와 수십 개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그러면 당나라는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약화될 뿐만 아니라, 동로마까지 이어지는 물류망이 위험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받는 상황이었다.한편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다. 3번이나 군대를 파견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은 고선지 장군을 선택해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윤명철,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
고선지는 누구일까. 668년 9월, 고구려는 항복을 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보장왕과 귀족들, 장군과 기술자 등 3만여 명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현재 시안)으로 끌고 갔다. 또한 669년 4월에는 20만명에 달하는 고구려 사람들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구실로 장쑤성·산둥성 등의 해안 지대와 내륙의 쓰촨성, 심지어는 사막지대인 간쑤성까지 끌고 가 황무지를 개척하게 만들고, 변방을 지키는 군인으로 삼았다.그때 고구려 출신의 뛰어난 장수가 고사계였다.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실력을 쌓았는데, 고구려인의 후예답게 말 타기와 활쏘기에 매우 능했다. 지금 신장성 지역에서 전공을 세운 그는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유격 장군’이라는 직위에 올랐다. 이어 747년에는 안서부도호라는 직책으로 승진하고, 본영을 쿠차(龜慈)에서 더 서쪽인 투루판(吐魯蕃)으로 옮겼다. 그 곳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도시이고, 당나라의 태종이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와중에 멸망시킨 고창국(高昌國)의 수도였다.
고구려 출신 병사들과 서역 정벌
현종의 명을 받은 고선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여 타클라마칸을 횡단했다. 그 속에는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되는 고구려 병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소설 서유기에서 묘사되듯 몽골의 고비사막과는 달리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사막이다. 무려 35일을 횡단한 끝에 서쪽 끝의 카쉬카르(현 신장성 카스)에 도착했다. 카쉬카르는 지금도 위구르인들의 독립 저항이 간간이 발생할 만큼 중국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서 아시아의 동과 서, 남과 북의 길이 만나는 십자로 같은 곳이다. 고선지 장군은 다시 남서쪽으로 행군을 계속해서 파미르 고원에 다다랐다.‘총령(蔥嶺)’으로 불리는 파미르 고원은 평균 높이가 5000m가 넘는다. 접근하고, 우회하는 길도 협곡과 급한 물살로 이뤄졌고, 정상에서는 고산병이 심각하고, 큰 생명체들은 살 수 없는 거친 환경이다. 지금도 행군하기 힘든 지역을 건너 무려 100일 동안을 행군한 끝에 오식닉국(현재 시그난 지방)을 급습했다. 연운보 전투를 벌여 적군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000마리의 말과 무기 등을 노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