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가을, 강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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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피스트가을
강준모형제들이 소리를 모아
엄니 보청기 하나 해드렸다
놀이터 낙엽지는 소리도 듣고
창가에 달빛 돋는 소리도 담고
돌아온 소리는 반가운데
덩달아 엄니 잔소리도 돌아오고
아버지 욱하는 소리도 따라왔다
돌아온 소리에 소음도 따라와
엄니 하는 말이
내 안에는 귀뚜라미 한 마리
사는구나 하신다
[태헌의 한역]
秋(추)
母親耳中補聽器(모친이중보청기)
子女集音待秋呈(자녀집음대추정)
可聞戱場落葉響(가문희장락엽향)
又得窓邊月光聲(우득창변월광성)
回來聲音固愉悅(회래성음고유열)
母誹父嗔亦現形(모비부진역현형)
聲音來時帶騷音(성음래시대소음)
母云吾內蟋蟀生(모운오내실솔생)[주석]
* 秋(추) : 가을.
母親(모친) : 모친, 어머니. / 耳中(이중) : 귓속. / 補聽器(보청기) : 보청기. 오늘날 중국인들은 조청기(助聽器)라는 표현을 쓴다.
子女(자녀) : 자녀, 자식들. / 集音(집음) : 소리를 모으다. / 待秋(대추) : 가을을 기다리다.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呈(정) : 드리다, 바치다.
可聞(가문) : ~을 들을 수 있다. / 戱場(희장) : 노는 마당, 놀이터. / 落葉響(낙엽향) : 낙엽 소리,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又(우) : 또, 또한. / 得(득) : ~을 얻다, ~을 얻을 수 있다. / 窓邊(창변) : 창가. / 月光聲(월광성) : 달빛 소리. 원시의 “달빛 돋는 소리”를 간략히 표현한 말이다.
回來(회래) : 돌아오다. / 聲音(성음) : 소리. / 固(고) : 진실로, 정말로. 한역의 편의를 위하여 원시에 없는 말을 역자가 임의로 보탠 것이다. / 愉悅(유열) : 유쾌하고 기쁘다, 반갑다.
母誹(모비) : 어머니가 잔소리하다, 어머니의 잔소리. 父嗔(부진) : 아버지가 성을 내다, 아버지의 역정(逆情). / 亦(역) : 또한, 역시. / 現形(현형) : 형체를 눈앞에 드러내다. 역자가 돌아왔다는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 ※ 이 구절은 원시의 6~7행을 간략히 표현한 것이다.
來時(내시) : ~이 올 때에. 원시의 8행 “돌아온 소리”를 한역하면서 5구의 표현과 차별화 시키고자 살짝 변화를 주어 ‘(소리가 돌아)올 때에’라는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 / 帶騷音(대소음) : 소음을 띠다, 소음을 달다, 소음을 달고 있다.
母云(모운) : 어머니가 ~라고 말하다. / 吾內(오내) : 내 안, 내 속. / 蟋蟀生(실솔생) : 귀뚜라미가 살다.
[한역의 직역]
가을
엄니 귓속 보청기는
자식들이 소리 모아 가을 기다려 드린 것
놀이터 나뭇잎 지는 소리 들을 수 있고
또 창가의 달빛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돌아온 소리는 정말로 반가운데
엄니 잔소리, 아버지 역정 소리도 돌아왔다
소리 돌아올 적에 소음 달고 와
엄니 말이 내 안에는 귀뚜라미 산다 하신다[한역 노트]
“틀니나 보청기, 지팡이 같은 노년의 그림자는 아직 없다.” ― 이 말은 한 일간지 기자가 철학자 김형석 교수와의 인터뷰를 소개하면서 마무리 코멘트로 들려준 것이다. 역자가 ‘노년의 그림자’라는 말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 달쯤 전에 <안경에게>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그 ‘노년’에 대해 얼마간 얘기를 한데다, 강준모 시인의 <가을>이라는 제목의 이 시를 조만간 소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준모 시인의 <가을>은 그 ‘노년의 그림자’ 가운데 보청기에 관한 시이다. 김형석 교수처럼 100세에도 노년의 그림자가 거의 없는 축복받은 삶도 드물게 있지만, 대개는 100세 고지를 올라보기도 전에 이승의 삶을 마감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은, 생의 아름다움을 꽃에 견줄 때 꼭 존속(存續)하는 기간으로만 그 가치를 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한 가정이 있다. 연로하여 귀가 어두운 “엄니”를 위해 정성을 모아 보청기를 마련한 자식들과, 그 보청기로 인해 “달빛 돋는 소리”도 귀에 담을 수 있게 된 “엄니”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 거기에 더해 그 “엄니”의 연세를 여쭈어 또 무엇을 하겠는가! 100세에 이르지 않아 ‘노년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들 그것은 비난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닐 것이다.시인의 “엄니”께서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듣기 어려움’으로 인해 불편을 겪었는지는 시를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보청기로 인하여 내심 기뻐하는 속내는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자식들에게는 다소 민망할지도 모를 노부부의 부부싸움이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일방이 상태가 안 좋아 그 흔한 부부싸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비하자면 확실히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 물 좋고 정자 좋고 바람까지 좋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세상사 이치가 대개 그러하듯 얻는 것이 있으면 각오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엄니”께서 “내 안에는 귀뚜라미 한 마리 사는구나”라고 하신 말씀은 자식들의 정성에 대한 고마움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보청기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을 “엄니”인들 어찌 좋아하실까만, 대놓고 기계음이 싫다고 하기에는 또렷하게 잘 들리는 ‘소리’들이 더없이 반가웠을 것이고, 그 반가운 만큼 자식들이 고마웠을 터라 소음을 귀뚜라미 소리로 표현하게 되었을 듯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보청기는 듣고 싶은 것이 있는데 못 듣는 경우에 사용하는 물건이다. 이와는 반대로 듣기 싫은 것이 있는데 들려서 들어야만 하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무엇일까? 바로 ‘귀막이’이다. 귀가 어두운 사람에게는 보청기가, 귀가 밝은 사람에게는 귀막이가 필요한 세상이다.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세상의 ‘헛소리’들만 골라 막아줄 편리한 귀막이가 있다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난청인 분이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보청기를 빼면 귀막이를 한 셈이 되니, 귀막이가 없다면 듣기 싫어도 들어야만 하는 귀를 가진 보통사람들보다 어쩌면 더 행복할 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보청기를 ‘노년의 그림자’로 볼 것이 아니라 ‘노년의 친구’로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역자는 연 구분 없이 11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8구의 칠언고시로 재구성하였다. 짝수 구 끝에 압운하였으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呈(정)’·‘聲(성)’·‘形(형)’·‘生(생)’이 된다.
2021. 10. 5.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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