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10억 소녀' 등극…광고계 접수한 그녀들의 정체 [오정민의 민지談]
입력
수정
[편집자주] MZ(밀레니얼+Z)세대가 경제와 소비의 흐름을 이끌고 있습니다. MZ세대는 머리글자를 따 의인화한 이름으로 '민지'라 불리기도 합니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잣대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바야흐로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움직이는 큰 손이 됐죠. MZ세대의 관심과 함께 피어나는 새로운 흐름과 이야기를 '민지담(談)'으로 모았습니다.
올해 광고계 최고 화제의 인물은 단연 버추얼(가상) 인플루언서 '로지'(사진)다. 개성 있는 마스크와 멋진 춤솜씨로 신한라이프 광고를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이후 기업들의 잇따른 러브콜로 단번에 '10억 소녀'로 올라섰다. 한국만의 사례가 아니다. 시공간 제약에서 자유로운 가상인간들이 각국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다.
"진짜 사람인 줄 알았네"…가상인간의 활약
버추얼 인플루언서란 소셜미디어 등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상인간을 뜻한다. 국내에선 가상인간 하면 1998년 등장한 '얼굴 없는 가수' 아담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컴퓨터그래픽(CG)에 그쳤던 과거와 달리 기술 발전은 버추얼 인플루언서에게 전혀 다른 입지를 부여했다.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진 속 로지는 언뜻 봐서는 사람과 구분하기 어렵다. 풍부한 표정과 포즈, 발랄함을 더하는 주근깨, 웃을 때 자연스레 잡히는 콧등 주름 등이 감쪽같다. 사진 속 등장인물들과도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실제 로지가 가상인간임을 밝혔을 때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어색하지 않은 매력을 바탕으로 로지는 단번에 광고업계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보험사(신한라이프) 광고에 이어 자동차(쉐보레) 골프복(마틴골프) 패션브랜드(질바이질스튜어트) 등까지 연달아 광고모델이 됐다. 올해 수익이 10억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사람과 닮았지만 사람다움을 느낄 수 없다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는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를 건너뛴 것.
'내면'의 성장을 내세운 가상인간도 있다. 인공지능(AI) 기술과 딥러닝으로 무장한 LG전자의 김래아가 이런 케이스.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김래아는 올해 1월 온라인으로 개최된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1'에 등장했다. 김래아는 AI 기술을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해낸 목소리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냈다.
아예 회사 업무를 맡길 가상인간도 등장했다. 롯데홈쇼핑이 선보인 가상인간 '루시'는 고도화를 거쳐 쇼호스트로 나설 계획이다.해외에선 한 발 앞서 가상인간들이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현재 가장 유명한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미국 AI 스타트업 브러드가 선보인 릴 미켈라다. 인스타그램에서만 300만명, 틱톡·페이스북 등을 포함해 500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거느린 스타다. 샤넬·루이비통 등 세계적 명품 브랜드 모델로 활동하는가 하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음반도 냈다. 영국의 온라인 쇼핑몰 '온바이'는 릴 미켈라의 지난해 수익이 1170만달러(약 13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세계 최초의 가상 슈퍼모델 슈두는 2017년 4월에 데뷔한 흑인 여성으로 설정됐다. 로지와의 콜라보(협업)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핑크색 단발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일본의 버추얼 모델 이마도 있다. 2019년 3D 이미징 스타트업 AWW가 선보인 이 가상인간은 최근 이케아의 하라주쿠 매장에서 3일간 숙식하는 동영상으로 화제가 됐다. 중국도 최근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이 공개된 대학생 화즈빙이 가상인간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 칭화대 컴퓨터학과 지식공정실험실과 함께 베이징즈위안인공지능연구원(BAAI), AI 기업 즈푸등이 개발하고 있다.
약 200명 활동 중인 가상인간…버추얼 인플루언서 '각광'
가상인간 정보 사이트 '버추얼휴먼스'에 따르면 이같이 활동 중인 가상인간은 세계적으로 186명에 달한다. 면면은 다르지만 이들이 활동하게 된 배경에는 온라인 공간의 활동을 즐기는 MZ(밀레니얼+Z)세대가 있다. 기술 발달로 AI와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에 익숙한 이들에게 가상인간은 그다지 먼 존재가 아니다. 특히 아바타 메타버스 공간인 '제페토'나 3D 게임 '마인크래프트', '로블록스' 등을 즐기는 Z세대는 가상인간과의 소통을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임명호 단국대 심리학 교수는 "SNS 문화에 익숙한 2030 세대는 가상공간이나 가상인물에 대한 몰입도가 높다. 기성 세대보다 Z세대를 비롯한 젊은층이 감정적으로 아바타에 대한 '동일시 효과'가 강해진 만큼 가상인간에 대해서도 친근감을 느끼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가상인간 도입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SNS의 발달과 함께 중요도가 커진 인플루언서 시장이다. SNS인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큼 근사하다는 뜻의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이란 신조어가 생길 만큼 SNS 활동이 중요한 MZ세대에게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흥미로운 존재로 다가왔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도 "메타버스 발달로 인해 (10대에게는) 가상세계와 현실과의 경계가 희미해져가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메타버스 플랫폼 안의 아바타는 본인이 느끼는 문제점이 개선된 '워너비 분신'인 셈이다. 가상인간 역시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시공간 제약 없고 '리스크 프리'
기업들도 버추얼 인플루언서 등장을 반기고 있다. 마케팅을 원하는 방식으로 리스크 없이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통상 연예인을 광고모델로 기용하면 평판 리스크가 따라온다. 특히 SNS 발달로 이름값을 높인 인플루언서는 화제성이나 주목도는 있지만 면밀한 검증이 되지 않아 학교폭력, 채무 논란 등 과거 행실과 관련한 논란이 불거질 위험도 있다.
가상인간은 진짜 사람이 아니다 보니 모델 컨디션 관리 등에서도 자유롭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 속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다는 점 역시 강점으로 꼽힌다. 미래 소비자인 'C세대(1996∼2012년생)'에게 소구력이 강한 가상인간을 선점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 인텔리전스는 "2022년에는 전세계 브랜드가 인플루언서 마케팅에 투입할 비용이 연간 150억달러(약 17조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버추얼 인플루언서들의 활동 무대가 넓어지는 효과도 뒤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최재섭 남서울대 유통마케팅학과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하는 상황이 2년 넘게 이어지는 만큼 소비자들이 (가상인간을 통해) 대리 만족하는 부분이 있다"며 "새로운 마케팅 도구의 관점에서 참신함이 있는 만큼 가상인간이 당분간 주목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정민 한경닷컴 기자 bloom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