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유쾌한 색의 마술사, 마티스[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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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빨강, 노랑 ···. 알록달록 색의 향연이 펼쳐져 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가 그린 '모자를 쓴 여인'이란 작품입니다. 풍경화가 아닌 인물화에 이토록 다양한 색이 담겨 있다니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옷과 모자뿐 아니라 얼굴도 알록달록합니다. 심지어 초록색이 많이 사용됐습니다.
이 그림은 마티스가 자신의 아내 아멜리에를 그린 것인데요. 관람객들은 물론 아멜리에조차 그림을 보고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얼굴이 초록색이니, 그럴 법도 하죠.
미국 평론가였던 레오 스타인도 신랄한 혹평을 내놨습니다. "지금껏 내가 본 것 중 가장 형편없는 물감 얼룩이다." 그런데 스타인은 이 말을 하고도 마티스의 그림을 구매했습니다.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을 직감했던 것이죠.
마티스는 이후에도 혹평에 시달렸지만, 다양한 실험과 작업으로 큰 화제를 몰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색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고,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죠.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알록달록 다채롭고 유쾌한 도전을 했던 마티스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마티스가 그림을 처음 시작한 건 21살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명 화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보였거나, 적어도 10대 후반엔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비해 마티스는 한참 늦게 화가가 됐습니다.
마티스가 그림을 접한 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장소도 독특합니다. 학교도, 집도 아닌 병원이었습니다.
마티스는 당시 맹장염 수술을 한 후 입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지루할 아들을 위해 그림 도구를 사줬는데요. 마티스는 이를 받고 재미 삼아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그림에 매료됐습니다. 이전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뜨겁고 묵직한 환희와 열정을 느꼈죠. 그리고 그는 화가의 길을 걷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했습니다.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아들의 얘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티스의 집안은 프랑스 북부 카토 지역에서 꽤 알아주는 부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곡물 상인이었죠.
아버지는 원래 아들이 사업을 물려받길 원했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했던 마티스가 법률가가 되려 하자, 이 또한 흔쾌히 응원해 줬습니다.
하지만 화가의 길은 달랐습니다. 이전에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늦은 나이에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크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티스의 열망은 이 장벽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파리로 훌쩍 떠났습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출발이 쉽진 않았습니다. 프랑스 유명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려 했지만 처음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장식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고, 루브르 미술관에 가 거장들의 작품을 틈틈이 모사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자신만의 화풍은 찾지 못했습니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따라 하는 수준이었죠.
그러다 마티스는 귀한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모사를 하던 중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등을 그린 귀스타브 모로와 교류하게 된 것입니다. 모로는 마티스의 숨은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화실에 받아줬습니다.
마티스가 모로와 같은 멘토를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모로는 사실주의 등 객관적 묘사부터 추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섭렵했죠.
에콜 데 보자르 교수기도 했던 그는 당시 다른 교수들과 달리 사고가 유연하고 자유분방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전통 기법에 구애받지 말고 화가의 개성을 담을 것을 강조했죠.
마티스에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표현방식이 단순하면 할수록, 감각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네." 모로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마티스. 그는 점차 자신의 개성과 생각을 작품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26살이 된 1895년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시선으로 '색'을 바라봤습니다. 이전 화가들은 형태를 묘사하는 법에 대해 다양한 시도와 변형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색을 표현하는 데 있어선 일정한 규칙을 지켜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색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티스는 색을 해방시키기 위해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초록과 빨강, 노랑과 보라 등 강렬한 원색과 보색 대비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또 정교하고 꼼꼼하게 칠하기 보다, 다소 거칠어도 자유분방하게 붓질을 했습니다. 주관적인 인물의 내면과 감정을 분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그린 '모자를 쓴 여인' '마티스 부인의 초상'에 초록, 빨강 등을 거친 붓질로 담은 것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을 본 한 비평가는 "마치 야수처럼 포악하고 거칠다"라며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마티스뿐 아니라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등 다른 화가들에게도 확산됐습니다. 이들의 작품이 파리에서 나란히 전시되기도 했죠. 그렇게 '야수파'가 탄생했습니다. 마티스는 이 흐름을 이끌며 야수파 대표 화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08년부턴 뉴욕, 모스크바, 베를린 등 다양한 도시를 넘나들며 개인전도 열었습니다.
그는 색의 해방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여기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마티스의 목표는 파격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균형감과 편안함을 지향했습니다.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꿈꾸는 것은 균형과 평온함의 예술, 즉 안락의자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시키는 예술이다." 니스의 아름다운 지중해 풍경을 담은 '니스의 실내 풍경', 행복하고 평온함이 가득한 '삶의 기쁨' 등엔 그의 철학이 잘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마티스의 특별한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경계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 피카소였죠.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엔 돈독했습니다. 마티스는 자신보다 12살 어렸던 피카소를 무명 시절부터 눈여겨보고, 재능을 인정해 줬습니다.
하지만 피카소는 훗날 마티스와 야수파 화가들에게 위협이 됐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미술계 흐름이 야수파에서 입체파로 넘어가게 된 것이죠. 마티스의 '삶의 기쁨'을 보고 자극을 받은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도전장을 내밀며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이후 10년 넘게 만나지 않았던 두 사람. 하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마티스는 피카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나를 평가할 권리가 있으니, 바로 피카소다."
마티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피카소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괴롭혔던 마티스가 사라졌다. 내 그림의 뼈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마티스다. 그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자 라이벌이었다." 마티스는 8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는 한참 전부터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습니다. 72세에 십이지장암에 걸려 큰 수술을 받은 이후, 이젤 앞에 장시간 서서 유화를 그릴 수 없게 된거죠.
하지만 마티스의 도전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다른 색의 마술을 시작했습니다. 종이에 물감을 칠한 다음, 이를 잘라서 풀로 붙인 것이죠.
'이카루스' '푸른 누드 Ⅱ' '폴리네시아, 바다' 등은 이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마티스는 종이 작업을 한데 모아 <재즈> 등 작품집을 내기도 했죠. 그의 종이 작업들을 보면 그 색감과 역동성이 유화에 결코 밀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색의 마술사 마티스의 마법이 통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색깔만큼 다양한 도전을 했던 덕분이 아닐까요. 알록달록 무지개 같은 마티스의 삶과 철학은 그림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프랑스 출신의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가 그린 '모자를 쓴 여인'이란 작품입니다. 풍경화가 아닌 인물화에 이토록 다양한 색이 담겨 있다니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옷과 모자뿐 아니라 얼굴도 알록달록합니다. 심지어 초록색이 많이 사용됐습니다.
이 그림은 마티스가 자신의 아내 아멜리에를 그린 것인데요. 관람객들은 물론 아멜리에조차 그림을 보고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얼굴이 초록색이니, 그럴 법도 하죠.
미국 평론가였던 레오 스타인도 신랄한 혹평을 내놨습니다. "지금껏 내가 본 것 중 가장 형편없는 물감 얼룩이다." 그런데 스타인은 이 말을 하고도 마티스의 그림을 구매했습니다.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을 직감했던 것이죠.
마티스는 이후에도 혹평에 시달렸지만, 다양한 실험과 작업으로 큰 화제를 몰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색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고,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죠.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알록달록 다채롭고 유쾌한 도전을 했던 마티스의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마티스가 그림을 처음 시작한 건 21살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명 화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보였거나, 적어도 10대 후반엔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비해 마티스는 한참 늦게 화가가 됐습니다.
마티스가 그림을 접한 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장소도 독특합니다. 학교도, 집도 아닌 병원이었습니다.
마티스는 당시 맹장염 수술을 한 후 입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지루할 아들을 위해 그림 도구를 사줬는데요. 마티스는 이를 받고 재미 삼아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그림에 매료됐습니다. 이전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뜨겁고 묵직한 환희와 열정을 느꼈죠. 그리고 그는 화가의 길을 걷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했습니다.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아들의 얘기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티스의 집안은 프랑스 북부 카토 지역에서 꽤 알아주는 부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곡물 상인이었죠.
아버지는 원래 아들이 사업을 물려받길 원했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했던 마티스가 법률가가 되려 하자, 이 또한 흔쾌히 응원해 줬습니다.
하지만 화가의 길은 달랐습니다. 이전에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늦은 나이에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크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티스의 열망은 이 장벽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파리로 훌쩍 떠났습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출발이 쉽진 않았습니다. 프랑스 유명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려 했지만 처음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장식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고, 루브르 미술관에 가 거장들의 작품을 틈틈이 모사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자신만의 화풍은 찾지 못했습니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따라 하는 수준이었죠.
그러다 마티스는 귀한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모사를 하던 중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등을 그린 귀스타브 모로와 교류하게 된 것입니다. 모로는 마티스의 숨은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화실에 받아줬습니다.
마티스가 모로와 같은 멘토를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모로는 사실주의 등 객관적 묘사부터 추상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기법을 섭렵했죠.
에콜 데 보자르 교수기도 했던 그는 당시 다른 교수들과 달리 사고가 유연하고 자유분방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전통 기법에 구애받지 말고 화가의 개성을 담을 것을 강조했죠.
마티스에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표현방식이 단순하면 할수록, 감각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네." 모로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마티스. 그는 점차 자신의 개성과 생각을 작품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26살이 된 1895년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시선으로 '색'을 바라봤습니다. 이전 화가들은 형태를 묘사하는 법에 대해 다양한 시도와 변형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색을 표현하는 데 있어선 일정한 규칙을 지켜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색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티스는 색을 해방시키기 위해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초록과 빨강, 노랑과 보라 등 강렬한 원색과 보색 대비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또 정교하고 꼼꼼하게 칠하기 보다, 다소 거칠어도 자유분방하게 붓질을 했습니다. 주관적인 인물의 내면과 감정을 분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그린 '모자를 쓴 여인' '마티스 부인의 초상'에 초록, 빨강 등을 거친 붓질로 담은 것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을 본 한 비평가는 "마치 야수처럼 포악하고 거칠다"라며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마티스뿐 아니라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등 다른 화가들에게도 확산됐습니다. 이들의 작품이 파리에서 나란히 전시되기도 했죠. 그렇게 '야수파'가 탄생했습니다. 마티스는 이 흐름을 이끌며 야수파 대표 화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08년부턴 뉴욕, 모스크바, 베를린 등 다양한 도시를 넘나들며 개인전도 열었습니다.
그는 색의 해방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여기에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마티스의 목표는 파격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균형감과 편안함을 지향했습니다.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꿈꾸는 것은 균형과 평온함의 예술, 즉 안락의자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시키는 예술이다." 니스의 아름다운 지중해 풍경을 담은 '니스의 실내 풍경', 행복하고 평온함이 가득한 '삶의 기쁨' 등엔 그의 철학이 잘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마티스의 특별한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경계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 피카소였죠.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엔 돈독했습니다. 마티스는 자신보다 12살 어렸던 피카소를 무명 시절부터 눈여겨보고, 재능을 인정해 줬습니다.
하지만 피카소는 훗날 마티스와 야수파 화가들에게 위협이 됐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미술계 흐름이 야수파에서 입체파로 넘어가게 된 것이죠. 마티스의 '삶의 기쁨'을 보고 자극을 받은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도전장을 내밀며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악화됐습니다.
이후 10년 넘게 만나지 않았던 두 사람. 하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마티스는 피카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나를 평가할 권리가 있으니, 바로 피카소다."
마티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피카소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괴롭혔던 마티스가 사라졌다. 내 그림의 뼈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마티스다. 그는 나의 영원한 멘토이자 라이벌이었다." 마티스는 8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는 한참 전부터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습니다. 72세에 십이지장암에 걸려 큰 수술을 받은 이후, 이젤 앞에 장시간 서서 유화를 그릴 수 없게 된거죠.
하지만 마티스의 도전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다른 색의 마술을 시작했습니다. 종이에 물감을 칠한 다음, 이를 잘라서 풀로 붙인 것이죠.
'이카루스' '푸른 누드 Ⅱ' '폴리네시아, 바다' 등은 이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마티스는 종이 작업을 한데 모아 <재즈> 등 작품집을 내기도 했죠. 그의 종이 작업들을 보면 그 색감과 역동성이 유화에 결코 밀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색의 마술사 마티스의 마법이 통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색깔만큼 다양한 도전을 했던 덕분이 아닐까요. 알록달록 무지개 같은 마티스의 삶과 철학은 그림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