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지나 환희에 다다른 불멸의 음악가, 베토벤[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고 베를린필이 연주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베를린필유튜브채널

"이제 음악의 역사가 바뀔 거야." 헝클어진 곱슬머리의 한 남성이 혼잣말을 합니다. 그리고 두 손을 움직여 지휘를 시작합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2006)의 한 장면입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교향곡 9번'(합창) 초연 모습이죠.

합창 교향곡은 영화 속 대사처럼 실제 음악의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00년 넘게 악기 소리로만 채워졌던 교향곡에 처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악기'인 사람의 목소리를 더해 만들었습니다. 위 영상에서도 이 천상의 음악이 주는 감동을 생생하게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영화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볼까요. 베토벤의 지휘로 이 곡을 들은 관객들은 혁신적이면서도 경이로운 음악에 감탄합니다. 연주가 끝난 후엔 기립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 환호성은 몇 초 동안 음소거 됩니다. 베토벤이 귀가 멀어 이 환호성을 듣지 못하는 상황을 음소거로 표현한 겁니다. 베토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음악을 들려줬지만, 정작 연주가 끝난 후 쏟아지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듣지 못합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
영화에서뿐 아니라 실제 이 공연이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토벤은 아예 청각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지휘까진 하지 못하고, 지휘자 옆에 앉아 악보를 보면서 중요한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던 베토벤은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환호성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알토 가수가 곁으로 와 그를 돌려세우고 나서야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알게 됐죠. 그리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답례의 인사를 했습니다.

베토벤의 삶을 관통하는 고통과 환희, 그 모든 것이 응축된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합창 교향곡뿐 아니라 수많은 베토벤의 명곡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울리고 있는데요. 그가 품었던 다양한 감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환희와 사랑을 노래했던 '악성(樂聖·음악의 성인)' 베토벤. 그의 격정적인 삶 속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독일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40대가 돼서야 자신의 진짜 나이를 알았다고 합니다. 1770년 생이지만 줄곧 1772년 생으로 알고 살았던 거죠. 이유는 아버지의 가짜 마케팅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테너이자 궁정악장으로 활동했는데요. 실력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의 재능이 출중한 것을 알고 한껏 욕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리고 있던 모차르트처럼 아들을 알리고 싶어 했고, 일부러 베토벤의 나이를 낮춰 신동 마케팅을 벌였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가혹할 정도로 음악 교육을 시켰습니다. 바이올린만 주고 방에 가뒀을 정도죠. 음악을 제외한 교육은 받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베토벤의 글쓰기와 계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죠.

심지어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는 베토벤에게 폭언과 폭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자신을 이용하는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를 위해 연주회로 돈도 끊임없이 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재능은 불행 속에서도 한껏 피어났습니다. 11살이 되던 해부턴 곳곳에서 인정을 받아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됐습니다. 먼저 11살에 오케스트라 단원이 됐고, 13살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습니다. 14살엔 쾰른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조수가 돼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죠.

그리고 3년 후 베토벤은 자신의 유년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던 모차르트와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게 됩니다. 클래식 역사에 길이 남은 두 천재 음악가의 만남이라니,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지 기대되는데요.

당시 모차르트 나이는 31살, 베토벤은 17살이었습니다. 베토벤은 모차르트 앞에서 즉흥곡 연주를 했고, 모차르트는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젊은이를 꼭 기억해 두라. 반드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다."

역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의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습니다. 베토벤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본으로 떠나야 했고, 모차르트는 35살에 숨을 거뒀기 때문이죠.

다행히 베토벤을 알아본 천재 음악가는 모차르트만이 아니었습니다. 베토벤이 22살이 되던 해 그를 괴롭혀 왔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 직후 베토벤은 하이든을 만나 제자가 됐습니다. 하이든뿐 아니라 모차르트와 경쟁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히즈베르거 등 최고의 음악가들이 그의 스승이 됐죠.
피아니스트 파질 세이가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워너클래식유튜브채널

그리고 베토벤의 명곡들이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로는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등이 있습니다. '비창'을 비롯한 베토벤의 32개 피아노 소나타는 피아노의 모든 가능성을 시험하는 작품들인 동시에 그의 고독한 영혼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이때 9개 교향곡의 위대한 여정이 시작됐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교향곡엔 그만의 감정과 개성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스승인 하이든으로부터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인 낭만주의의 길을 열었던 것이죠.

베토벤의 음악 인생은 1800년대에 이르며 급격히 전환됩니다.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비극인 청력 장애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죠. 1796년부터 증상이 나타났는데, 베토벤은 이 사실을 한참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치료를 받았습니다. 음악가에게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치 않은 거죠.

치료에도 계속 증상이 악화되자 그는 1802년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크나큰 고통 탓에 동생들에게 유서를 써 두기도 했습니다. 이를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고 하는데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25년이 지나 발견된 이 편지는 자살을 할 생각으로 썼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살하지 않았죠. 그 이유는 베토벤의 얘기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 가슴속에 있는 창작욕을 다 태우기 전에는 세상을 떠날 수 없었다."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고 도이치캄머필하모닉이 연주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운명)/DW클래식음악유튜브채널

이후 그는 더욱 음악 활동에 매진합니다. 1805년을 전후로 '교향곡 3번'(영웅), '교향곡 5번'(운명), '교향곡 6번'(전원), '피아노 소나타 14번'(월광), '피아노 소나타 23번'(열정) 등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명곡들이 잇달아 탄생했습니다.

운명 교향곡의 강렬한 도입부는 오늘날까지도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도입부에 대해 베토벤은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라고 설명했는데요.

하지만 정작 그는 평생 잔인한 운명에 괴롭힘을 당했으면서도 운명론자이길 거부했습니다. 베토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운명에 굴복해선 안 된다"라고 강조했죠.

1819년 베토벤의 청각은 완전히 상실됐습니다. 귀가 안 좋아질수록 그의 성격은 더욱 예민하고 괴팍해져 갔습니다. 평생 미혼으로 살았던 베토벤은 동생의 아들이자 조카인 카를에게 집착 증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생이 죽은 후 카를의 후견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카를의 어머니인 요한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카를과 만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카를은 베토벤의 지나친 집착에 자살을 감행했을 정도로 괴로워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카를은 목숨을 구했지만, 베토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고 건강도 더욱 악화됐죠.

하지만 베토벤은 정말 운명에 맞서 싸우기라도 하듯 작곡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매일 악상을 떠올리며 작업을 했고 괴테, 셰익스피어, 실러 등의 작품을 읽으며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토록 뜨거운 창작욕과 예술혼이 뒤섞여 그의 음악 세계는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1824년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합창 교향곡이 탄생했습니다.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인용하고 재배치해 만든 작품이죠. 규모도 엄청납니다. 100여 명의 관현악단, 네 명의 솔리스트, 100여 명 이상의 합창단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대작입니다. 전곡을 감상하는 데만 70분 넘게 걸리죠.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은 단지 규모 때문만이 아닙니다. 1악장에서부터 차례로 불안과 투쟁, 유희, 숭고한 사랑과 아름다움 등 다양한 감정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4악장에 도달하면 극한의 전율과 함께 폭발적인 환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백만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라는 노래가 가슴 가득 울려 퍼지죠.

너무도 완벽하고 훌륭한 이 작품 때문에 훗날 후배 음악가들이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완벽주의자였던 브람스는 이 곡을 뛰어넘는 교향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는데요. 이 때문에 첫 번째 교향곡을 만드는 데 무려 20년을 보냈습니다.

유명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한스 폰 뷜로는 고심 끝에 탄생한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듣고 호평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베토벤의 교향곡 10번을 만났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전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집니다. 자유와 환희, 인류애를 노래하는 만큼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에 딱 어울리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곡에서 베토벤의 위대한 삶과 철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뛰어난 사람은 고독과 고뇌를 통해 환희를 차지한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