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삼성, 이건희 회장 살아계셨으면 안주한다고 혼쭐났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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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OB들 '정신 재무장' 주문삼성전자는 글로벌 제조업체의 정점에 있는 기업이다. 미국 인텔을 누른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동시에 TV와 스마트폰 시장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수익성 측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다. 삼성전자는 코로나19로 세계 제조업체의 공급망이 붕괴한 지난 3분기에도 15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삼성전자를 보는 투자자들의 눈은 곱지 않다. 올해 초 10만원에 육박했던 삼성전자 주가는 현재 7만원 안팎까지 내려앉았다. 투자자들이 납득할 만한 비전 없이는 주가가 움직이지 않는 ‘PDR(price to dream ratio·꿈주가배수)’ 시대이기에 이런 상황은 더욱 뼈아프다.
반도체·TV 글로벌 1위도
이건희 회장이 일군 업적
신경영 선언 지금도 유효
1등에 멈추지 말고 변신해야
7만 전자 벗어날 비전 기대
‘7만 전자’ 넘어설 비전은
이건희 삼성 회장 타계 1주기(10월 25일)를 앞둔 24일. 삼성 전직 최고경영자(CEO) 사이에선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 오히려 위기일 수 있다. 이 회장의 정신을 되새겨 정신 재무장을 해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나왔다.삼성 전직 CEO들은 삼성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경쟁력을 갖춘 배경으로 이 회장을 꼽았다. 캐시카우인 반도체가 대표적이다. 이 회장은 1974년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고 이를 발전시켜 1994년 세계 D램 시장 1위를 거머쥐었다. TV(2006년 1위 달성), 스마트폰(2011년 1위 달성) 등도 ‘초일류’를 부르짖은 이 회장이 키워낸 사업으로 꼽힌다.2021년 삼성이 당면한 문제는 한층 복잡하다. 미국, 유럽, 중국 등이 앞다퉈 반도체 사업에 뛰어드는 ‘반도체 패권전쟁’에 대응하는 한편 새로운 성장동력도 찾아야 한다.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를 벌리고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게 전부였던 이 회장 재임 시절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삼성 전직 CEO들은 “경쟁 구도와 경영 환경은 바뀌었지만 해법은 다르지 않다”며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신경영 선언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입을 모았다.
1993년 이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사장단을 불러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그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모르니까 (당신들이) 편안하다”며 “매일 같은 양복 입고 같은 넥타이 매고 있으니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다들 모른다”고 꾸짖었다. 이어서 나온 게 신경영 선언을 가한다.
“전문 경영인들 현실 안주”
삼성자산운용·삼성증권 CEO 등을 지낸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은 “회장님이 살아계셨으면 삼성 사장단을 혼쭐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 하드웨어는 참 잘한다고 말씀을 드리면 ‘로봇과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신하고 플랫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반도체 배터리 잘 만드는 제조업체로 만족하는 것 아니냐. 너희 때문에 식은땀이 난다’고 답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익명을 요구한 다른 삼성 전직 사장도 “초일류에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이 회장의 DNA를 되새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와 TV 등 잘하는 사업에만 자원을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는 “삼성이 스마트폰 기기는 애플보다 더 많이 만들어도 이익과 시가총액에서 비교할 수 없다”며 “최근 삼성에서 이렇다 할 ‘변신’을 본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삼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또 다른 전직 사장은 “이 회장 1주기 행사도 크게 못 치르고,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에 자유롭게 참여도 못하니 그룹이 전체적으로 위축돼 있다”며 “후배 전문경영인들도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재빨리 구심점을 잡아 긴장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며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한시가 바쁘다”고 조언했다.
제조업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삼성 전직 CEO는 “자체 플랫폼을 구축하지도,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갖추지도 못한 탓에 애플이나 구글 같은 플랫폼 기업만큼 기업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메모리 의존도가 높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도체 가격이 뚝 떨어지는 상황이 오면 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했다.
이수빈/박신영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