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연 작가 "꼰대 영감 대신 멋진 아버지 그리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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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추는 남자'로 혼불문학상 받은 허태연 작가“저처럼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멋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997년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계신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어요. 그러다 깨닫게 된 건 이 아버지가 꼭 나만의 아버지는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등단작…동화같은 소설
67세 굴착기 기사가 주인공
20년 전 쓴 글보며 변신 다짐
"다음 소설은 언제 나오지…
기대할 수 있는 작가 되겠다"
제11회 혼불문학상을 받은 허태연 작가(39·사진)는 수상작 《플라멩코 추는 남자》(다산책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동화 같은 장편소설이다. 주인공은 은퇴를 결심한 67세 굴착기 기사 허남훈.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보, 나 밥 줘’라고 소리치고, 중고 굴착기를 사러 온 청년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전형적인 ‘꼰대’다.그런 그가 20여 년 전 죽다 살아난 뒤 썼던 ‘청년일지’를 다시 들여다보며 변화를 다짐한다.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스페인어 배우기’ ‘플라멩코 배우기’ 등 남은 생애 동안 이룰 과제를 정한다. 그리고 여러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다. 은희경 작가 등 심사위원들은 “가족에 대한 위로가 장점으로 읽혔다”며 “무엇보다 작품의 가독성이 좋았다”고 평가했다.
이 소설은 작가의 등단작이다. 대학에서 글쓰기를 공부하고, 몇몇 공모전에서 상도 받았지만 등단의 꿈은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장편 과학소설(SF)을 3년 동안 붙잡고 고쳐 쓰기를 반복했지만 좋은 성과가 없었다.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지난 3~4월 두 달 만에 완성했다. 그는 “문학성 있고 깊이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방해가 됐던 것 같다”며 “이 소설은 뱃속의 아기를 위해 즐겁게 쓰려 했다”고 밝혔다.
주인공 허남훈은 작가의 아버지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는 42세에, 작가가 16세일 때 세상을 등졌다. 그는 “어릴 땐 아버지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인지 몰랐다”고 했다.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나이가 들고 결혼하면서 아버지의 빈자리가 점점 크게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소설을 쓸 때 아버지를 계속 생각하게 됐다. 그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모르지만 이렇게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살아나신 것만으로 제게는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책은 동화처럼 쉽게 읽힌다. 큰 갈등도, 나쁜 사람도 없다. ‘꼰대 영감’이 갑자기 ‘멋진 영감’으로 변하는 부분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여기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됐다. 허 작가는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멋진 어른, 아버지를 많이 만났다”며 “일부러 좋은 아버지, 멋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없던 작가는 성인 남성을 불신했지만, 학교에서 만난 훌륭한 선생님들 덕분에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청년일지는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옛날 각오를 되새기게 하는 한편 주인공의 젊은 시절을 들춰낸다. 청춘일지를 통해 주인공이 옛날에 한 번 결혼했다는 점, 전처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는 점 등이 드러난다. 허 작가는 “도서관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그림책 만드는 수업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어르신들에게 자서전을 그림책으로 만들어보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소설 속 청춘일지로 이어지게 됐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했다는 허 작가는 앞으로도 장편소설만 쓸 계획이다. 한 문장 한 문장 공 들여 써야 하는 단편과 달리 장편은 구조가 느슨해도 이야기의 힘으로, 캐릭터의 매력으로 독자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꼽은 그는 “독자들이 ‘이 작가의 다음 소설은 언제 나오지?’ 하고 기대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