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사망] 민주화 후 첫 '군인 대통령' 영욕의 삶

신군부 2인자서 직선제 대통령 당선…6·29 선언 발판 대선 승리
'보통사람 시대'로 군부정권 탈색…조기 레임덕 '물태우' 오명
'북방외교'로 외교 새 지평 열어…한중, 한소 수교, 남북화해 이끌어내
퇴임 후 불법 비자금 혐의 구속…12·12, 5·18로 단죄 후 은거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잇는 과도기의 대통령이었다. 엘리트 출신 장성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수직 상승을 거듭하다 집권 후 조기 레임덕에 빠지고 퇴임 후 옥고를 거치는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영욕의 삶을 살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에 따른 국가 위기 상황이던 12월12일 육사 동기생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신군부의 군권 찬탈을 주도하며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당시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을 사전 모의했던 노 전 대통령은 거사 당일 쿠데타의 성패가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휘하의 9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신군부의 군권 장악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이를 계기로 전두환 5공 정권의 2인자로 급부상했다.

특히 같은 TK(대구경북) 출신인 전 전 대통령이 거쳐 간 길을 약속이나 한 듯 이어받았다.

공수특전여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전방 사단장을 거쳐 쿠데타 성공 후 제5공화국의 밑그림을 그린 보안사령관을 지낸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5공이 출범한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뒤 전 대통령의 '후계자'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무2장관을 시작으로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85년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돼 명실상부한 권력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1987년 6월 10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체육관에서 차기 대통령직을 예약했지만 '노태우 시대'를 만들어낸 계기는 '6·29 민주화 선언'이라는 정치적 승부수였다.

노 전 대통령은 당초 1987년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한 전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를 "고뇌에 찬 역사적 결단"이라고 환영했다.

그러나 6·10 민정당 대선후보 선출 전당대회를 계기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등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6월 29일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 항이 담긴 선언문을 전격 발표했다.

이 선언은 군사정권의 2인자였던 그를 일약 민주화 쟁취의 '조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해 12월 치러진 직선제 대선에서 그는 민주화 진영의 호소에도 후보 단일화를 끝내 거부하고 독자 출마를 강행한 양김(兩金), 즉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제13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노 전 대통령은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제6공화국의 문을 열었다.

노태우 정권 5년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 시대에서 벗어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민주화의 욕구가 분출한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옛 소련의 해체로 미·소 냉전체제가 붕괴하면서 정부가 '북방외교'로 공산권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외교의 지평을 넓혀나간 시기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율의 리더십을 표방하며 점진적인 개혁 조치로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려 했지만, 취임 두 달 만에 집권 여당인 민정당의 총선 패배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면에 놓이면서 정상적 국정 운영에 제동이 걸렸다.

특히 1988년 제13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야권의 '5공 청산' 드라이브로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쫓겨가 은거하고,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중간평가' 논란이 겹치면서 정국의 혼란이 가중됐다.

노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JP)의 공화당을 합치는 기습적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호남에 기반을 둔 김대중의 평민당을 에워싸는 '배타적 지역연대'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을 총재로, YS를 대표로 내세운 민자당은 그러나 출신과 이념이 전혀 다른 정파끼리 합친 탓에 출범부터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삐걱댔고, 끊임없는 계파 갈등은 노 전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을 급속도로 위축시켰다.

결국 임기 중반부터 레임덕에 빠졌고,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판 속에 '물태우'라는 원치 않는 별명도 얻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은 YS계의 흔들기 등 정권 내부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통일 외교 분야에선 혁혁한 성과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련 해체와 동·서독 통일 등 대외 정세가 급변하는 와중에 러시아·중국과 수교하는 등 북방 외교에 적극 나선 것은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한반도 통일 과정과 이후 청사진을 제시한 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남북관계 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점도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불운의 나날을 보냈다.

1995년 10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재임 중 4천100억 원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고, 결국 전직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12·12 사태의 주모자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소유예 처분했던 검찰이 두 사람을 법정에 세우게 한 계기가 됐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1종의 훈·포장을 박탈당하는 등 어두운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세상을 뜨는 순간에도 6·29 선언의 주체, 12·12와 5·18의 진실, 3당 합당 과정, 불법 비자금의 용처 등 베일에 가린 현대사의 진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6공 시절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6·29 선언은 (당시) 전 대통령이 노태우 대표에게 먼저 제의한 것"이라고 썼으나, 노 전 대통령은 끝내 말이 없었다. 박 전 의원은 또 3당 합당을 전후해 노 전 대통령이 YS에게 정치자금 조로 '40억 원+α'를 전달했다고 주장했으나, 이 또한 역사의 비밀로 남게 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