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1970년대 삼성처럼 반도체 진출 검토…NEC 만류에 접어"
입력
수정
지면A4
100년의 기억, 신격호 회고록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는 평생을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내수 기업, 일본 자본, 부동산 재벌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고통스러워했다. 28일 출판된 롯데그룹 공식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사진)에서 “답답하고 분통터지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평생 편견과 싸운 기업인
日자본·부동산재벌 편견에 '답답'
호남석화 인수 땐 국적 시비까지
'껌 장사' 이미지 벗으려 고군분투
철강 등 기간산업 진출 무산에
"국민의 삶에 기여하겠다" 결심
식음료·호텔 등 유통제국 일궈
1978년 호남석유화학(당시 대주주 한국종합화학)을 인수할 때의 일은 재일 기업인이라는 벽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한국종합화학 대표였던 ‘전쟁 영웅’ 백선엽 대장은 “나(신격호)를 귀화한 일본인이라 생각했는지 국적을 문제 삼아 입찰서류를 반려했다”고 회상했다. 신 회장은 일본 신주쿠구청에 가서 주민등록 서류까지 떼와야 했다. 그곳엔 이렇게 표기돼 있었다. ‘본명:신격호, 일본명:시게미쓰 다케오, 국적:대한민국.’
일본에서 1등 후 금의환향했으나…
‘청년 신격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41년 30세의 나이에 110원(당시 그의 월급은 30원이었다)을 들고 시모노세키행 관부 연락선에 올랐다. 맨손으로 1961년 연 매출 60억엔의 회사(일본 롯데제과)를 만들어 업계 1위에 올랐다.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78달러에 불과할 때였다.먼 타국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방인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이와 관련해선 1962년 금의환향 후의 일화가 소개돼 있다. “신문사들을 예방했는데 4월 21일자 경향신문 내방(內訪)란에는 시게미쓰 다케오 미(美) 롯데주식회사 사장과 신격호 씨가 각각 방문한 것으로 표기돼 있었다. 아마도 롯데라는 이름 때문에 미국 회사로 오인한 모양이었다.”회고록에서 신 명예회장은 ‘껌 장사’라는 비하를 어떻게 감내해야 했는지를 술회했다. “듣자하니, 롯데가 제과, 식음료, 호텔, 유통, 테마파크 등의 사업을 핵심으로 한다는 점을 들어 나를 소프트웨어형 인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청년 시절부터 기계에 심취했고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하드웨어에도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다. 한국에 투자하려고 할 때 내가 의욕을 보인 분야도 정유나 제철사업이었다”고 말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기 직전 해인 1977년 롯데는 반도체산업 진출까지 검토했었다. 하지만 “일본전기(NEC) 사장에게 밝혔더니 롯데는 삼성처럼 반도체를 자체 수요하는 사업구조가 아니니 포기하는 게 낫다는 조언을 듣고 이듬해에 포기했다.”
“국민의 삶에 기여하는 기업 만들었다”
신 명예회장은 이 같은 편견을 “소비자의 행복과 건강에 이바지하는 것이 기업의 궁극적 목표”라는 일념으로 극복했다. 그의 강력한 무기는 신뢰였다. 1960년대 초 초콜릿 사업을 시작할 때의 일이다. 원료 탱크에 쥐털 한오라기가 발견됐다. 가차없는 결정이 내려졌다. “10t짜리 탱크 3개에 들어 있는 초콜릿 원료 2억엔어치 전량을 불에 태웠다.”한국에 국보급 랜드마크를 만들기 위해 노년에 착수한 롯데월드타워는 무려 23번이나 마스터플랜을 변경했다. “지진이 나면 월드타워로 대피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튼튼하게 완성하기 위해서였다.철강 등 기간산업에 대한 투자가 실패한 이후에는 ‘국민의 삶’에 더 집중했다. 1971년엔 한국에 처음으로 직판 유통을 도입했다. “모국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니 국가경제라는 큰 그림이 그려졌다면 제과업을 떠올린 후에는 국민의 삶을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우리 국민에게 다양한 먹거리, 품질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면서 회사도 발전했으니, 처음에 제과업을 선택한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자부심을 보였다.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