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하자

한경 CMO Insight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 스티커 메시지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
김병희 서원대 교수
경영자나 정치인은 말할 기회가 많다. 그때마다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뒤돌아서면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애매할 때가 많다.

모든 연설은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해야 하는데도, 그들의 발언은 날마다 새 소식을 전하는 뉴스 같다.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같은 내용을 그대로 다시 내보내는 뉴스는 없다. 사건의 전개 양상에 따라 다음 뉴스에서는 추가 정보를 제공한다.

광고는 다르다. 한번 만든 광고는 카피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복한다. 짧게는 한 달, 보통은 6개월, 길게는 3년도 반복한다. 단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까닭은 광고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기억시키려는 목적 때문이다.

경영자나 정치인이 메시지를 자주 바꾸면 시간이 지난 다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떠한 단어나 이미지도 남지 않는다.한 표가 소중한 선거판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후보는 메시지를 자주 바꾸고 싶은 과욕을 버리고 사람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하나의 메시지만 채택했다.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맥아더 장군의 전속부관 생활을 무려 9년 동안이나 묵묵히 수행했던 일화로도 유명하며,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 미국의 첫 대통령이기도 하다.
아이젠하워의 정치광고 ‘아이크’ 편 (1952)
아이젠하워의 정치광고 ‘아이크’ 편(1952)을 보자. 1952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선거 참모들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아이디어를 찾느라 고심하다 선거 캠페인을 전문가에게 맡겼다.“나는 아이크가 좋다(I like Ike).” 어빙 베를린(Irving Berlin)이 쓴 짧은 카피다. 아이크(Ike)는 아이젠하워의 애칭이다.

카피가 평범하다며 선거 참모의 90%가 반대했지만, 아이젠하워는 광고 전문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군인다운 간명한 결정이었다.

살벌한 경쟁이 펼쳐지는 대통령 선거전에서 아이젠하워는 “나는 아이크가 좋다”라는 하나의 메시지로 유권자 곁으로 다가갔다.결국 아이젠하워는 제3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광고에서 쓰인 알파벳은 아이(i), 엘(l), 케이(k), 이(e)라는 네 글자다. 애칭 아이크(Ike)를 활용해 “아이 라이크 아이크”를 수차례 반복했다.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한 것.

“I like Ike”는 수사학에서 말하는 유음중첩법(類音重疊法, paronomasia)을 활용한 카피다. 유음중첩법이란 음은 비슷하지만 의미는 다른 단어를 결합시켜 리듬감을 살리고 의미의 강도를 심화시키는 일종의 말놀이(말장난)인데, 우리나라 판소리 사설에서도 자주 쓰였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으로서의 인기나 한국전쟁을 반드시 끝내겠다는 선거 공약이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지만, 정치 슬로건도 한 몫 한 것이 분명하다.

선거 참모들은 다른 후보자처럼 접근하지 않았다. 많은 자랑거리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나는 아이크가 좋다”로 승부수를 던졌으니, 알파벳 네 개가 대통령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타임(TIME)은 역사상 톱10 캠페인의 하나로 이 광고를 선정했다. 아이젠하워는 1956년의 선거에서도 “여전히 아이크가 좋다(I still like Ike)”라는 슬로건을 써서 재선에 성공했다.

지금 우리나라도 정치의 계절에 접어들었다. 선거가 시작되면 정치 광고가 슬슬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광고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후보자들도 선거 운동이 시작되는 순간 너나없이 광고 전문가를 찾는다.

선거법에 묶여 광고 물량을 소나기처럼 퍼부을 수 없는 실정이라 선거 캠프에서는 마음이 다급할 것이다. 후보자들 역시 강조할 게 많은지 공약을 죽 나열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필패다.

이때도 핵심 공약을 단일한 하나로 요약해서 제시해야 한다.

또 다른 사례인 마거릿 대처(Margaret H. Thatcher)의 정치광고 ‘실업자의 행렬’ 편(1978)을 보자.

영국에서는 지난 1978년의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이 노동당에게 큰 격차로 뒤지고 있었다.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후보가 제임스 캘러헌 노동당 당수에게 밀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광고인들이 보수당 캠프에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그때 광고회사 사치앤사치(Saatchi & Saatchi)의 광고 창작자들은 “노동당은 일하지 않는다(Labor isn’t working).”라는 카피를 제안했다.

사람들이 실업 수당을 받으려고 실업자 사무소 앞에 장사진을 치며 길게 늘어선 사진에 이 카피를 붙였다. 광고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궁지에 몰리고 있던 대처 후보를 구해낸 결정적인 메시지가 되었다.

일하지 않는 노동당 캠페인을 성공시킴으로써 보수당은 선거에서 승리했고, 마침내 마거릿 대처는 영국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내는 동안, 대처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하나에 집중한 메시지가 11년 집권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업자의 행렬’ 편 (1978)
두 광고에서 채굴한 경영의 스티커 메시지는 단일성(Oneness)이다. 단일성(單一性)이란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단 하나의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성질을 말한다.

아이젠하워의 정치광고에서는 아이크가 좋다는 하나만 강조했고, 대처의 정치광고에서도 일하지 않는 노동당이라는 하나만 강조했다.

우리나라 기업에서는 슬로건을 너무 자주 바꾼다. 기업 슬로건을 자주 바꾸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최고 경영자가 싫증내기 때문에 바꾸는 경우도 많다.

하나의 슬로건을 너무 오래 쓰지 않았느냐며 지루해한다는 것.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판단이다. 자사의 광고를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은 해당 광고주일 수밖에 없다.

자기네 광고가 잘 나오나 안 나오나 하며 너무 자주 광고를 봐서 싫증날 때 쯤 되면, 소비자들은 이제 막 그 광고를 처음 보는 순간일 수도 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돼온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같은 장기 캠페인은 아주 드문 사례다.

유권자의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선거판에서 아이젠하워의 선거 참모들도 상황에 따라 얼마나 자주 슬로건을 바꾸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참았다.

정치판에서 한 슬로건을 8년이나 쓴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의 산물이다. 대처의 캠프에서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으리라. 선거의 계절을 맞이해 우리나라의 대선 후보들도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기업의 경영자들도 많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하나의 주장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한 후보자에게 복이 있나니, 당선의 영광이 그들의 것이니라.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경영자에게 복이 있나니, 기업의 성공이 그들의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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